금지옥엽 외동딸 무쇠같은 맏딸로 키워주신 분 

올해 2월, 구정 연휴 동안의 우리 가족 이야기를 다룬 기획 기사를 쓰기 위해 가족 사진을 찾던 도중, 잊고 있던 뜻밖의 보물을 발견했다. 바로 외할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손편지와 노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20여 년만에 처음으로 내 손에 잡힌 건 외할아버지가 직접 내용을 쓰시고 곱게 코팅 처리까지 하신 ‘착한 아이 5가지 수칙’ 알림판이었다. ‘잘 지키면 할아버지가 큰 상을 준다.’는 눈이 번쩍 뜨이는 약속으로 시작한 이 항목 판의 뒷면엔 당시 어린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한 5가지 규칙에 대한 설명과 예시까지 자세히 쓰여 있었다.

물론 부모님께 보내는 외할아버지의 선물도 있었다. 올바른 자녀 교육, 심신 건강 단련법, 1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귀가 안전 지도법까지. 오죽했으면 문서 서두에 외할아버지 본인께서도 ‘중요한 내용을 강조한답시고 욕심내다보니, 중복되는 당부도 많고 글재주가 없어 보기 답답하게 여겨질지 모르겠다.’고 염려를 표하셨을 정도다.

어렸을 적에는 삽화 그림 하나 없고, 설상가상 알아보지 못하는 한자까지 섞여 답답하고 고루하기만 했던 외할아버지의 가르침들이었다. 하지만 성인이 돼 다시 읽어보니 복잡한 일상에 치여 살기 급급했던 나에게 잊고 있었던 삶의 중심을 되돌아보게끔 한다. 

어릴 땐 당연하게 여기고 받았던 외할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한 것이었는지 느껴졌다. 내 인생의 첫 선생님, 또 하나의 부모님, 사랑하는 나의 외할아버지. 그 분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보려한다. 

어린 시절 나와 외할아버지.

지킬 건 지키는 왈가닥, 사당동 골목 소녀 ‘어뚜’

외할아버지는 전직 보통학교 선생님이었다. 6·25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도 피난민 학생들을 모아 가르칠 정도로 교육열과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컸다. 외할머니나 어머니께서 ‘융통성 없다.’고 고개를 저을 정도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작은 일이라도 뜻을 꺾지 않는 고집 센 분이기도 했다.

외손주들 중 맏손녀로 태어난 내게 외할아버지는 정말 큰 사랑을 줬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평일의 대부분을 외갓집에서 보냈던 내게 외할아버지는 공부며 예절, 인성 교육까지 직접  가르쳐줬다. 공깃돌·주판을 이용한 산수, 한글 필사, 위인전 읽기 등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 될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외할아버지의 사랑이 좀 더 특별했던 이유는 내가 한두 살배기 어린 아이였을지라도 내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주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밖에서 내가 우악스럽게 흙장난을 하며 놀고 있으면 외할머니께선 기겁을 하고는 못하게 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놀이터의 모래를 한 소쿠리 퍼서 냄비에 담아서는 센 불에 달궈 소독한 모래를 갖고 놀 수 있게 해줬다. 

나의 두 번째 생일. 초를 끄고 있는 나를 대견하게 바라보는 외할머니(우)와 어머니(좌).

이런 외할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나는 다른 외가 식구들로부터도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첫 조카인 나를 친자식처럼 업고 안아주며 귀여워해준 둘째 이모,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쉬고 있는데 웬 새끼 곰같은 조카 하나가 덤벼들며 혀 짧은 발음으로 “땀뚠(삼촌)!”을 외치며 어깨를 찍어 눌러도 “어뚜(‘연수’의 혀 짧은 발음) 왔어?”하며 반갑게 맞아주시던 막내 외삼촌까지. 아직도 이모와 외삼촌은 내가 거의 첫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내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는 매우 엄하셨다. ‘위험하게 뛰어놀지 말라.’는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어기고 외갓댁 베란다에 올라가, 난간 사이로 위험하게 고개를 빼고 골목 친구들과 고래고래 수다를 떨면, 외할아버지께선 즉시 모진 회초리질을 했다. 다리 살을 할퀴는 아픔에 집이 떠나가라 엉엉 울고 목이 쉴 때 쯤이면, 외할아버지께선 매를 놓고 “다시는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마라.”며 타일러 주셨다. 그리고는 울먹거리며 “다신 안하겠다.”고 다짐하는 어린 손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부모님도 외할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의 예외 대상은 아니었다. 내게 감기약을 달다면서 먹이는 부모님께 외할아버지께서는 “아서라, 애한테 거짓을 가르치면 못쓴다. 사소한 것을 속이면 다음에 애가 부모 말을 믿겠느냐? 쓴 약이라고 사실대로 얘기해줘야지.”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리곤 내게 “연수야, 이 약은 쓰지만 그래도 먹어야 감기가 빨리 낫고 몸이 시원해진단다. 연수는 씩씩한 사람이니까 쓴 약도 잘 먹을 수 있을 거야.”라고 달래며 조심조심 내게 약 한 숟갈을 먹였다. 그렇게 삼킨 약의 쓴 맛은 외할아버지 말씀대로 참을만 했다.

맞벌이 부모님과 떨어져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외가의 보살핌 덕분에 활발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드리지 못한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생신 선물

외할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추억만큼이나 외할아버지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많은 이유는 외할아버지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께선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매해 외조부모님 생신엔 외가 식구들이 다 같이 집에 모여 조촐하게 생신을 축하드렸는데, 미술을 좋아했던 나는 생신 때마다 내 손으로 직접 공예품, 그림 등을 정성껏 만들어 드렸다. 그리고 외조부모님들은 내 작품을 거실이나 부엌, 식탁에 차곡차곡 진열했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그 해 봄 생신 때도 나는 선물로 종이 공예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내 뜻과는 달리 공예품은 서로 잘 붙어있지 않고 자꾸 망가지기만 해 결국 선물을 드릴 수 없었다. 서운해하던 내게, 당시 투병으로 야위고 꺼칠해진 모습의 외할아버지께선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며 “선물은 다음에 또 주면 되지 않느냐?”며 다독였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는 외할아버지의 위로에 겨우 서운함을 가라앉혔는데, 그 해 여름 어느 날 아침,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었다. 부모님께서 “이미 외할아버지께선 충분히 네 마음을 고맙게 잘 받으셨을 거다. 선물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라.”고 위로했지만 내 스스로 약속을 못 지켰단 아쉬움에 계속 울었다.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서글퍼지기도 한다.

외할아버지 생신 때 나와 어린 사촌들이 생신 축하 노래를 불러드리려고 기다리고 있다.

‘어뚜’가 ‘연수’가 되어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먼저 감사와 그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리고 현재의 내 모습에 남아있는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의 자취를 찾게 된다. 사실 나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10년 넘게 외동딸로 자라며 넘치는 사랑을 독차지하며 컸다.

하지만 외동 자녀들이 듣기 쉬운 ‘안하무인 응석받이’나 ‘온실 속 화초’라는 핀잔을 듣지 않고 ‘의젓하게 잘 컸다.’는 칭찬을 들으며 자랄 수 있었던 데에는, 어릴 때부터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올곧게 자라도록 뒷받침해준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동딸보다는 ‘든든한 맏딸’의 이미지에 가깝게 클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외할아버지. 성인이 되어 종종 나의 진로, 목표, 내가 이 복잡한 세상에서 나아가야할 길을 두고 다시 한 번 연약한 꼬맹이로 돌아간 기분이 들 때마다 외할아버지가 그리워지곤 한다. ‘외할아버지가 계셨으면 뭐라고 조언해 주셨을까? 내가 어떻게 사는 게 내 인생에서 올바른 선택일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텐데.’하는 생각이 든다.

외할아버지께서 직접 작성하신 교육 지침과 노트들.

“가족 앨범 찾겠다며 서랍 뒤지다가, 갑자기 왜 울어?”

문득 방문을 열어본 어머니께서,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휴지를 쥐고 눈가를 닦는 내 모습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민망함에 서랍을 다시 정리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맏딸’로 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 하며 외할아버지의 노트를 펼쳐본다.

공감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