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서울 마포에 마을책방 ‘퇴근길 책 한 잔’ 연 김종현씨
ㆍ독립출판 서적들 가득…매주 금요일 ‘영화 상영회’도

골목은 조용했다. 허름한 과일가게와 부동산 중개업소, 족발집이 드문드문 자리했다. 큰길 건너 이화여대 앞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그런 풍경을 곁으로 한 서울 마포구 염리동 골목 한 귀퉁이에 마을책방이 있다. 간판도 걸지 않은 독립출판물 서점 ‘퇴근길 책 한 잔’을 알리는 팻말이 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점 주인 김종현씨(33)는 “길 가다가 간판을 보고 들어올 사람이 없는 데다 돈도 없어 간판을 달지 않았다”고 했다. 책방 안엔 대형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베스트셀러는 없다. 대신 저자가 직접 기획해 인쇄한 독립출판 서적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진열대를 차지했다.

서울 염리동에서 독립출판물 서점 ‘퇴근길 책 한 잔’을 운영하는 김종현씨가 마을책방을 열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서점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마을책방을 낸 이유는 뭘까. 최근 만난 김씨는 “어차피 돈의 노예로 살 거라면 ‘자발적 거지’가 되겠다”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명문대를 졸업한 뒤 2008년부터 대기업에서 일했다. 김씨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 것’이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입사 2년째 되는 날 사표를 썼다.

그는 중학교 동창과 회사를 차렸다. 사업은 잘 굴러갔다. 사무실에 딸린 침실은 여행객에게 제공했다. 여행지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현지인에게 부탁해 제공받는 ‘카우치서핑’ 호스트가 된 것이다. 소파를 뜻하는 카우치(Couch)와 서핑하기(Surfing)의 합성어인 카우치서핑은 1999년 한 미국 대학생의 아이디어로 시작돼 올해 1000만명의 회원이 무료로 여행객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다.

서울 염리동에서 독립출판물 서점 ‘퇴근길 책 한 잔’.

김씨는 사업 파트너 김은지씨(33)와 카우치서핑 호스트 경험을 녹여 2012년 <카우치서핑으로 여행하기>라는 책을 펴냈다. 하지만 김씨의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 사업을 하는데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며 “친구는 계속 사업을 이어가고 싶다고 해 내 지분만 정리한 뒤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2013년 벨기에를 시작으로 프랑스, 폴란드, 멕시코 등 유럽과 남미를 돌았다. 여행 경비는 많이 들지 않았다. 카우치서핑을 이용해 무료로 숙박을 해결했다. 그는 “사업도 해보고 공짜로 여행도 다녀보니 최소한의 돈 이외에는 사는 데 큰 필요가 없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김씨는 평소 좋아하는 ‘책’과 ‘비주류 문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권리금 없이 월세만 내는 조건으로 지난 4월 염리동에 책방을 열었다. 영업시간은 오후 3시부터 9시까지다. 퇴근길에 술 한잔 걸치기 좋은 시간이다. 김씨의 책방에서는 술과 차도 판다. SNS로 서점 소식을 알리면 알음알음 손님이 찾아온다.

김씨가 운영하는 오프라인 모임은 여러 개다. 그중 ‘자발적 거지’ 모임은 많을 땐 20명 남짓 모인다. 돈 없이 여행하기, 사표 쓰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등을 논의한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책방에서 영화 상영회가 열린다. 그래서 책방은 종종 밤새 열려 있곤 한다. 김씨는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세상이 정해놓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 많다”며 “입시, 취업, 결혼처럼 세상이 정해놓은 순서와 법칙을 깨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