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전화' 박주선·조승하씨]

엄마, 36년 동안 무료 전화 상담… 보고 자란 딸도 올해 봉사 시작

최고의 격려는 "들어줘서 고맙다"

지난 10월 초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 생명의 전화' 서울 센터로 한 30대 여성이 전화를 걸었다. "자꾸만 고립되는 느낌이 들어 답답해 죽고 싶다"고 했다. 자원봉사 상담사 조승하(26)씨가 "많이 힘드신가 봐요. 요즘 어떤 게 힘드세요"라고 묻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움을 요청한 여성은 깜짝 놀란 듯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상담해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40분 넘게 이어졌다. 죽고 싶다던 여성은 "친구들은 다 결혼하고 나만 남았는데 부모님은 결혼 생각이 없는 날 못마땅해한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조씨에게 "후련하게 속에 있는 얘기를 다 한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얼굴 없는 친구가 생긴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한국 생명의 전화’서울 센터에서 상담 봉사를 하고 있는 박주선·조승하 모녀(母女)가 수화기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이태경 기자

조씨는 생명의 전화에서 2년간 상담 교육을 받고 올해 무료 전화 상담 봉사를 시작했다. 설립 40년이 된 사회복지법인 '생명의 전화'는 전국의 19개 센터를 통해 삶에 지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30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교대로 24시간 전화를 받는다. 조씨는 한 달에 이틀 자원봉사를 한다. 더 자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상담사의 심리적·정신적 부담을 염려해 전화 상담을 한 달에 이틀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박주선(62)씨도 1980년부터 지금까지 5000여 명을 전화로 상담해온 베테랑이다. 조씨는 어렸을 때 주말마다 집을 비우는 엄마가 야속했다고 한다. "전화 받고 올게. 아빠 말 잘 듣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 엄마는 해가 질 무렵에야 돌아왔다. 엄마는 지친 모습이었지만 마중 나온 딸을 늘 활짝 웃으며 안아줬다.

박씨는 딸에게 "오늘은 혼자 애를 키워 힘들다는 아주머니 고민을 들어주느라 늦었다"며 "그런데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 들으니까 엄마가 오히려 더 고맙고 행복해지더라"고 했다. "힘들어하는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상대적으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는 말도 자주 했다.

딸은 엄마 말을 듣고 학교에서 반 친구들 고민을 들어주면서 상담사의 꿈을 키웠다. 엄마는 딸의 담임교사에게 이런 얘기를 듣고 대견해서 상담 노하우를 조금씩 전수해주기 시작했다. 2013년 호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조씨는 공항에 마중 나온 엄마에게 "이제 엄마처럼 상담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씨는 말없이 딸을 안아줬다.

어머니 박씨가 상담 봉사를 했던 1980 ~1990년대만 해도 주로 30~40대 여성들이 집안일이나 성추행에 대한 하소연을 많이 했다고 한다. 지금은 20대 취업 준비생이나 40~50대 남성들의 전화가 부쩍 늘었다. 하루는 상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딸이 엄마에게 취업 준비생과 상담한 얘기를 했다. "서류 심사만 50번 이상 떨어져 더는 원서를 낼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취업난 때문인지 요즘 젊은 사람들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고 외로움이 묻어난다"고 했다.

상담 봉사를 하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돼 2014년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한 조씨는 "엄마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SOS(조난신호)에 진심을 담아 응답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딸의 손을 잡고 박씨는 "36년 전 처음 생명의 전화 수화기를 들었을 때의 나보다 네 열정이 더 넘치는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