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작가 이미경의 구멍가게 오후 세시]

어린시절 품에 끼고 살던 보물상자. 딱지·사진·종이인형…
인연을 맺었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한곳에 오래 터를 잡고 살다 보니 우리 집 꼬맹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 성인이 되었습니다. 한번 자리를 잡은 집안의 물건들은 어지간해서는 바꾸거나 옮기지 않아 늘 그대로입니다. 어느 날 창고 방을 정리하다 어릴 때 애지중지 품에 끼고 살던 먼지 쌓인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인형, 딱지, 구슬, 미니카, 콩알만 한 장난감이 한가득…. 버리지 않고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리는 뒷전이고 구석구석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던 물건들을 들추다 보니 하염없이 옛날 생각에 잠겼죠.

제가 어릴 땐 종이인형을 사는 것보다는 마루치 아라치, 캔디, 마징가Z 등 만화영화 캐릭터는 물론 예쁜 소녀를 종이에 그린 뒤 오려서 놀았습니다. 그 위에 입힐 갖가지 옷이며 신발, 모자, 가방 등도 만들었죠.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사과 상자에 한가득 쌓였는데, 친구들과의 인형놀이도 재미있지만 그것들을 만들 때 훨씬 더 신이 났습니다.

그림 이미경
흑백 TV에서 나오던 수퍼히어로 소머즈나 원더우먼, 그리고 특히나 얼굴 가득 앉은 주근깨가 나와 꼭 닮은 말괄량이 삐삐가 제일 부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동생의 딱지를 왕딱지로 만들까 고민했고 딱지치기를 해서 동네 딱지를 싹쓸이하는 날을 꿈꿨지요. 잦은 이사로 기억에 남는 친구가 없던 그때, 친구가 되어 놀아주던 종이인형과 인형을 곱게 정리해두었던 인형 상자가 생각납니다.

물건과 사람은 서로 인연을 맺고 살고 있습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 온전히 존재할 때 비로소 나의 것이라 느낍니다. 열거해 볼까요. 딱지, 풍선껌 안에 들어 있던 작은 만화책, 만화경, 유리상자, 열쇠, 돌멩이, 인형, 카드, 우표, 누더기가 된 퀼트 이불의 부드러운 촉감, 쩌얼꺽 하며 시간을 알리는 괘종시계의 소리, 흑백사진들, 맨 처음 갖게 된 샤프, 오르골, 책갈피에 꽂아 말린 나뭇잎과 꽃잎들, 구멍 난 스웨터, 장롱 뒤에서 그렇게 찾아 헤매던 물건을 이사할 때 발견하는 순간… 박제된 허물의 먼지를 털어낸 사물을 통해 내 품에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그 순간의 냄새, 풍경, 색깔, 감정들이 바람처럼 다녀갑니다.

유년 시절은 누구나 한번은 지나왔죠. 누군가에겐 어렵고 힘든 시절이라 아픔과 상처가 더 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행복하거나 소중했던 순간이라 합니다. 그래서 힘들었던 순간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애틋함으로 남아 있나 봅니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바라는 것, 소중한 것, 지키고 싶은 것들이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문득 다시 한번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뭘까 생각해 봅니다. 기억의 사물들로 가득 채웠던 유년의 보물상자를 열면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바가지머리의 꿈 많았던 소녀가 묻습니다. "너는 지금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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