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한용희에게

한동안 그쳤던 장맛비가 어둠을 가르며 후드득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고희 선물로 당신이 마련해준 자그마한 글방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여보! 내 곁을 지켜준 당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지난 41년을 한결같이 곁을 지켜준 당신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소위 의사라는 사람이 그동안 입원을 밥 먹듯 했으니 당신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지체장애인을 선뜻 배우자로 맞이한 당신이기에 늘 감사하며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칠순 잔칫날 급성방광염으로 응급 입원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올봄 고희를 맞이하기 이틀 전 입원해 방광의 종양을 다섯 개나 떼어내는 수술을 받은, 멍청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남편을 보고 한심하다 못해 차라리 달아나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 종양이 악성이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내가 위암으로 위의 4분의 3을 잘라 냈을 때의 그 엄청난 충격이 재현될까 노심초사했던 당신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고맙고 미안했는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라는 내가 한동안 우울증의 늪에서 자살 시도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색도 하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당신의 남다른 노력에 내가 엄청 감동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지요. 혼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나 몰래 내 시(詩)를 ‘영남문학예술인협회’에 제출해 단 한 번 만에 시인으로 만들어 준 당신의 은혜를 죽은들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토요일에 당신이 마련해 준 이 글방에서 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들으며 창밖의 공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키가 160㎝가 안 되고 못 생기고 왜소한 나를 남편으로 맞이해 40여 년을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줘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들 둘과 더불어 진료실을 굳건히 지킬 수 있게 된 것 또한 당신이 내 곁에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남은 시간을 더 소중하게 가꾸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겠습니다. 지는 해가 하루 중 가장 아름답듯 멋있고 보람된 인생 마무리를 할 수 있게 노력을 더 하겠습니다. 종윤이 결혼식을 앞두고 당신의 몸도 마음도 많이 분주하겠지요. 남부럽지 않은 청년으로 키워낸 당신의 공을 그 무엇으로 견줄 수 있겠습니까? 다음 달 말경에 출간되는 수필집으로 당신에 대한 감사인사를 대신하겠습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동안 엄마처럼 누이처럼 보듬어 준 당신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음 생에서도 당신과 함께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지난해 가을 가곡발표회 때 당신이 독창을 부르게 됐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도 중요한 문학 행사가 있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합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다 나를 구해준 것은 언제나 당신의 사랑이었습니다. 여보! 지난 41년간 숱한 일이 있었건만 군소리 없이 묵묵하게 내조한 당신에게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그 감사한 마음을 다 표시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의견 차이가 심해 부부 싸움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상흔과 같습니다. 새살은 상처 위에서 돋아나듯이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길이 우리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시냇물이 강물이 되고, 강물이 바닷물이 되듯, 남은 우리의 2막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봅시다. 의과대학 재학생 신분에 하지 지체장애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선뜻 나와 결혼해 준 당신. 만일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건장한 청년으로 만나겠습니다.

남편 김정곤 (울산 김정곤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