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연(1933∼2003)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일부)

내가 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또 그런 내가 하나의 유의미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소중한 이름을 지어주신 우리 할머니.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어느덧 약 20년이 돼갑니다. 저는 매년 이맘때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그해 가을이 생각납니다. ‘영차영차, 이겨라, 이겨라!’ 땀을 뻘뻘 흘리며 가을운동회를 준비하고 있던 그해 가을, 할머니께서는 병원 입원 중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죠. 뇌종양으로 편찮으셨던 할머니는 수술만 잘 받으면, 금방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의사의 호언장담에,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감마나이프 수술을 받으시고, 그 후유증을 크게 앓으셨죠.

힘들었던 기억은 잠시 지워두고 할머니와의 따뜻했던 추억에 대해 회상해 볼까 합니다. 당시 넉넉지 못했던 집안 환경 탓에 부모님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갑작스레 임신하게 된 저를 낳지 않으려 결심할 당시 “첫아이만큼은 반드시 낳아야 한다. 첫아이를 잘못 유산하면 나중에는 아이를 원해도, 난임 등으로 고생할 수 있다. 내가 너희들 대신 아이를 키워줄 테니 아들딸 구분 말고 꼭 낳거라”라는 할머니의 긴 설득 끝에 저는 세상 밖으로 눈을 뜨고 나올 수 있게 됐습니다.

어머니의 출산과정부터 산후조리까지 손수 다 해주시고, 늘 ‘은혜를 잊지 말고 살라’는 의미에서 제게 ‘혜련(惠蓮)’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신 우리 할머니.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 대신, 할머니께서는 저의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입학식, 운동회 등 크고 작은 행사에 오셔서 부모님 역할을 대신해 주셨습니다.

밥을 먹을 때 한 번도 생선살을 드시지 않던 할머니께 왜 계속 뼈 부위만 드시는지 물으면 “생선 머리가 제일 맛있다”며, 손녀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듯 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시던 할머니.

할머니의 삼일장을 마치고 할머니 댁으로 돌아오던 그날, 어찌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 생신 때마다 드렸던 손수 꾹꾹 눌러 쓴 편지며 그림이며, 모두 버리지 않고 앨범 속에 고이 간직하고 계셨지요. 수술 후유증으로 시력과 기억 일부를 잃었던 할머니는 가끔 정신이 돌아와 동네 친구분들과 고스톱을 즐기시며 버신 100원짜리 동전 몇 개,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이라도 항상 은행으로 들고 가셔서 제 이름으로 된 통장에 저금하셨다고 합니다. 통장 앞에 써 있던 ‘혜련이 대학 등록금’. 할머니께서는 그렇게 쌈짓돈을 저금해 손녀딸 대학 등록금을 내 주시려 했던 모양입니다.

할머니, 할머니께는 늘 병아리와도 같던 제가 어느덧 30대 성인이 됐습니다. 할머니께서 주신 과분한 사랑을 저 또한 다른 이들에게 나눠줄 때가 온 것 같네요. 하늘나라에서는 살아생전 아프셨던 고통을 모두 잊고, 늘 평안한 모습으로 저희 가족을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할머니, 다음 생에 다시 만나요.    손녀 박혜련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