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균(1932~2020)

나의 장인어른은 경남 함안에서 정미소를 하는 부잣집 장남으로 태어나셨으니 남부끄럽지 않은 출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을 낳아주신 친모가 해산 후 얼마 안 돼 돌아가셔서 장조부님은 새 장가를 드셨고 아버님은 그를 가엾게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컸다고 한다. 내 아내는 아버님이 자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셨으며 이복동생들 틈에서 느끼는 고독감이 컸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영특한 이정균 소년은 마산고등학교에서 공부도 잘했기에 당시에 가장 인기 있다는 서울대 화공과에 진학했고 수학한 섬유공학을 바탕으로 제일모직에 취직하셨다. 콜롬보플랜이라는 원조 프로그램으로 호주에 1년 연수도 다녀오는 특혜도 누리셨다. 한때 일본 지점에 근무해 아버님의 서재에는 일본기업 관련 서적이 수북이 쌓여 있다.

건장한 체격에 운동도 잘하고 영어·일어에도 능통한 아버님은 팔방미인이셨다. 아버님은 삼성물산에서 승승장구하셨고 후일 코오롱상사 부사장도 지내셨는데 당시 한국 수출의 역군 중 한 분이었다. 내 아내를 포함한 2남 2녀도 든든한 아버님의 리더십 아래 행복하게 성장했다.

나는 대학 동기인 아내와 사귀게 됐다. 1980년대에 외교관이면 일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는데 장인·장모님은 미온적이셨다.

부모님 뜻과 관계없이 동갑내기들이 만난 것도 그렇지만, 마산고 동기 노재원 대사 가족의 외교관 생활의 애환을 알고 계신지라 딸이 그 길을 가는 것이 걱정되신 것이다. 평소 전화 바꿔 주실 때도 엄격한 목소리를 내시던 아버님이 어느 날 나를 불러다 놓고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일장 훈시를 하셨다. 너무 긴장했는지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아버님은 처음으로 웃는 표정을 지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워낙 갑자기 허락하니 별로 기쁘지도 않은가베?’ 그제야 따님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을 깨달았다.

그 뒤 아버님은 나를 볼 때마다 당시 국제 현안에 대해 질문하시며 외교관 사위와의 대화를 이어가는 노력을 보이셨다. 이제 아버지가 딸에게 주는 사랑의 일부가 딸과 운명을 같이하는 나에게 전달되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됐다. 해외 생활을 하는 손녀들에게도 영어로 말을 붙이시고 아이들은 외할아버지를 ‘그램스(gramps)’라고 부르며 따랐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어른들은 조금씩 늙어 가셨다.

10년 전까지 건강하시던 어른이 3년 전 낙상을 한 번 당하시더니 급격히 심신이 쇠약해지셨다. 아버님은 우리가 주선한 요양병원의 친절한 서비스에 만족하시면서 우리가 면회 가면 영어를 몇 마디 쓰시는 모습도 보여주셨다.

그러나 지난 12월 15일 그 요양병원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처음 나온 일주일 후 감염된 아버님은 지난 12월 27일 숨을 거두셨다. 코로나라는 이유로 임종도 못 하고 화장을 우선 한 후 장례를 치르고 여주의 공원 묘원으로 모셔야 했다. 서릿발 내린 묘원에서 아버님의 유골함을 안치하고 오열하는 가족들.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고 평생 노력하는 삶을 보여주신 아버님이 이제 이 차가운 곳에 혼자 남으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하염없는 슬픔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버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

사위 윤여철 전 주(駐)이집트 대사

현 광주광역시 국제관계대사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