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양일승님

평생 논밭을 일궈 오남매를 길러내신 젊은 날의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더 키가 크셨다. 그런데 95세의 아버지 키는 이제 내 어깨밖에 닿질 않는다. 농사일로 허리가 굽을 대로 굽어 똑바로 누우시질 못하니 잠자리인들 편하실 리 없다.

작년 이맘때쯤 기침을 할 때 종종 가래와 함께 피가 섞여 나오신다길래 병원에 갔고 검사 결과 폐암이란 걸 알았지만, 차마 아버지께 말씀드리질 못했다. 고령이어서인지 병세가 크게 악화하지 않은 채 아버지는 힘들지 않을 정도의 농사일을 소일거리 삼아 하셨고 그런 아버지를 자식들은 모두 죄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다시 봄이 왔는데 달포 전부터 급격하게 기력이 쇠약해지셨다. 사립문을 닫고 오시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지고 만 것이다. 얼굴 한쪽 찰과상 외에 크게 다치신 곳은 없었지만, 그 이후로 거동이 힘들어져 혼자 힘으로는 자리에서 일어나실 수조차 없게 됐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병원으로 모시게 되니 멀리 있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해 행여 이 길이 아버지와 마지막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차오른다.

아버지의 손은 농사일로 마디마디가 굵어지고 휘어지다 못해 비틀려 있다. 오늘따라 온기 없는 거친 손은 아무리 주무르고 비벼드려도 따뜻해지질 않는다. 아들 등에 업혀 아무것도 모른 채 어머니와 생이별하듯 차에 태워져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는 이 길이 무섭고 두려우신 건지 아버지는 한 손으로 내 한쪽 무릎을 꽉 잡고 계신다. 병원까지 가는 30여 분 내내 아버지는 내 무릎을 놓지 않으신다.

병원에 도착해 휠체어에 앉아계신 아버지께 조심스럽게 암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다. 혹시 예상을 하셨던 건지 미동도 않고 묵묵히 듣기만 하신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짧은 순간 가만히 눈을 감고 계시던 것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연세가 있으셔서 병이 거의 진행이 되지 않으니 너무 걱정 마시라고 그냥 감기 같은 거라 생각하시면 된다고 했다.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하고 병실로 올라오신 아버지는 많이 지쳐 보였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잠이 드셨다. 그런 와중에도 “닭 모이 주어야 하는디… 거름자리 비닐 덮어야 하는디…” 하시며 작은 소리로 잠꼬대를 하셨다. 꿈속에서조차 농사일, 집안일만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렇게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신 아버지는 “먼 길 왔다 고생만 하고 간다”면서 “어서 가라”며 나와 아내를 걱정하신다.

수저 위에 얹어드린 생선 반찬을 오물오물 드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며칠 새로 또 올게요. 치료 잘 받고, 많이 잘 드셔야 해요” 하고는 입술을 꽉 깨물고 돌아섰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집에 혼자 쓸쓸하게 누워계실 어머니는 지금 뭘 하고 계실지… 아버지를 업고 나올 때 몰래 눈물 훔치시는 걸 보았는데….

아침에 아버지·어머니 두 분 모두 아내가 끓여드린 소고기죽을 참 맛있게 잡수셨다. 잘 불린 쌀을 참기름에 달달 볶아 곱게 간 소고기와 잘게 썬 당근, 호박, 양파를 넣어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였다. 아내는 팔 아픈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저어가며 끓였다. 평소에 자주 못 해드리는 게 죄스러워 커다란 솥에 하나 가득 끓여놨는데….

맛있게 드시던 두 분의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뵙는 것이 설마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 거라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열어 휴가 날을 잡아본다.  양동인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