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인 박광은씨가 자신이 운전하는 모빌리티 서비스 ‘고요한 M’ 택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택시 외부에는 수어로 ‘자립’이라 래핑이 돼 있다. 강윤중 기자택시 운전기사 박광은씨(36)의 차량 외부엔 ‘특별한’ 그림이 랩핑돼 있다. 무의미하게 나열된 듯한 네 개의 손 모양은 수어로 ‘자립’을 뜻했다. 청각장애가 있는 박씨는 한때 태극마크를 단 농인 탁구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무릎 부상으로 은퇴한 뒤 여러 일자리를 거쳐 지난해 11월 청각장애인 기사가 운전하는 모빌리티 서비스 ‘고요한M’에 정직원으로 취업했다. “승객이 전한 따뜻한 말 한마디에 편견의 벽이 허물어지는 걸 느낀다”는 박씨를 지난 13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수어 통역은 고요한M을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코액터스의 윤정하 매니저가 담당했다.

‘데플림픽’ 공식 홈페이지에 박광은씨의 선수 시절 이력이 기록돼 있다. 데플림픽 홈페이지 갈무리박씨가 처음 탁구채를 잡은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탁구는 박씨에게 “유일하게 재밌는 놀이”였다. 탁구를 하기 위해 농학교 대신 일반 중학교로 진학했고,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농인 탁구 국가대표가 됐다. 박씨는 고등학생이던 2001년 청각장애인이 참가하는 올림픽대회인 ‘데플림픽’에서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선수생활 중 “가장 성취감을 느낀 순간”이라고 했다. 10년이 넘게 탁구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그를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공으로 큰 편견을 날리는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스물여덟에 국가대표를 그만뒀다. 오른쪽 무릎 관절 수술을 두 차례 겪은 뒤였다.

2012년 제7회 아태농아인경기대회에서 박광은씨(맨 왼쪽)가 탁구 남자 단체전 준우승을 한 뒤 찍은 사진. 박광은씨 제공박광은씨가 탁구 선수로 활동할 당시 대회에 출전해 받았던 메달들. 박광은씨 제공이후 밤에는 학교 기숙사 생활지도사, 낮에는 탁구 지도자로 생활했다. 안정적인 일자리는 아니었다. 박씨는 “농인 탁구선수를 지도하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수입이 너무 적어 꿈을 접게 됐다”고 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중 지난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고요한M 기사 모집 공고를 봤다. 10년차 운전 경력자였지만, “운전을 업으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는 “뉴스를 통해 택시 운전기사 폭행사건 등이 알려지며 농인들 사이에서 ‘택시는 위험한 일자리’란 인식이 있었다”며 “승객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가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고 했다.

막연한 불안은 일을 하며 줄어들었다. 박씨는 “청각장애인도 서비스 직군에서 충분히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구나 느꼈다”며 “승객들도 고요한M 서비스를 통해 장애에 대한 편견을 줄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승객은 청각장애인이 모는 택시가 안전할까 걱정했는데, 직접 타본 후 편견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안전운전은 자신있어요. 청각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시야가 1.5배 정도 넓거든요. 여기에 더해서 ADAS(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의 도움도 받을 수 있죠. 차선 이탈이나 보행자 추돌 방지 알림이 시각정보로 제공이 돼요.”

고요한M 택시에 탑승한 승객은 눈높이에 설치된 태블릿PC를 통해 운전기사에게 목적지 등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강윤중 기자박광은씨가 운전석에 설치된 태블릿PC로 승객의 인사에 답장을 하는 모습. 강윤중 기자기사와 승객의 소통은 태블릿PC를 통해 이뤄진다. 승객은 눈높이에 맞게 설치된 태블릿에 목적지 등을 입력할 수 있다. 음성은 문자로 자동 변환되며, 키보드나 손글씨로 글자를 직접 입력할 수도 있다. 메시지는 기사용 태블릿에 곧바로 전달되며, 기사도 손글씨나 키보드를 통해 답변이 가능하다. 말소리는 없어도, 마음이 오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돈 많이 버세요’ ‘고생 많으세요’ 말 한 마디 덧붙여주는 승객들이 계세요. 이럴 땐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이 무의미한 것 같아요. 마음은 어떻게든 전달이 되니까요.”

박씨를 비롯해 전국에서 활동하는 청각장애인 택시 운전기사는 약 20명이다. 청각장애인이라고 운전면허 시험 과정이나 택시 운전면허를 따는 절차가 다르지 않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청각장애인 운전면허 소지자는 지난해 3월 기준 2만6279명에 이른다. 한림대 박군석 교수 연구팀이 경찰청 의뢰를 받아 낸 ‘청각장애인 운전면허 제도 개선방안 연구(2008)’에 따르면 청각장애인 교통사고 발생율은 1.2%로 비장애인(0.86%)과 큰 차이가 없다.

박광은 기사의 최종 꿈은 후배들을 위한 탁구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그는 농인 선수들에 대한 열악한 지원 환경을 개선하고 싶다고 했다. 강윤중 기자박씨는 “일에 대한 만족감은 10점 만점에 8점”이라고 했다. “동료 기사들이 전부 청각장애인이잖아요. 수어 통역사가 있는 택시 회사는 저희가 유일할 거예요. 고된 날도 있지만, 편하게 소통이 가능한 동료들이 있다는 건 엄청난 혜택이라고 봐요.” 택시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히는 사납금제가 없다는 점도 장점이다. 박씨는 “주간에는 평균 7~10명, 야간에는 15~20명의 승객이 탑승하는데 최근엔 코로나19로 승객이 많이 줄었다”며 “그래도 월급제로 운영돼 돈에 대한 압박이 적다”고 했다. 나머지 ‘2점’은 서비스의 활성화로 동료기사와 수어 통역사의 수가 늘어날 것을 기대하며 남겨둔 점수다.

택시 운전기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박씨에게 삶의 목표를 물었다. 예상보다 ‘큰’ 답변이 돌아왔다. “제 최종 목표는 농인을 위한 탁구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거예요. 재능있는 후배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지원 미비로 선수생활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봐왔어요. 이런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우선 돈을 안정적으로 열심히 벌어야겠죠. 승객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최종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보겠습니다.(웃음)”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