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

약 30년 전인 1993년 여름, 저는 중학교 1년 후배에게 20만 원을 빌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저는 후배에게 돈을 돌려주지도 않았고, 다시 연락하지도 않았습니다.

먼저 제 후배를 소개합니다. 1986년에 중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1년 후배와 함께 반장 등 임원 간부야유회에서 같은 조가 돼 서로 알게 됐죠. 기억해보면 재미있고 여러모로 성격이 잘 맞았던 후배였습니다. 중학교 졸업 이후 저와 후배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진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간이 흘러 3년 뒤인 1993년 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6년여 만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어릴 때 기억으로 너무 반가웠습니다. 서로 다른 일정을 제쳐놓고 술자리에 마주 앉아 지난 몇 년간의 서로 얘기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후배는 재수도 하고 K대 한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다시 시험을 쳐 Y대 치의예과를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습니다.

그때부터 몇 달간은 어릴 때처럼 서로 자주 연락하고 지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과 후배에게 소개팅을 주선해주기도 했었죠. 당시 여름방학을 맞아 저는 영어 공부를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때마침 학교에서 실시하는 영어특강이 있었고, 특강 비용이 약 30만 원이었습니다. 부모님께 더 이상 손 벌리기 싫었던 저는 일단 주변에 돈을 빌려서라도 특강을 신청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생각이 난 게 후배였고, 후배는 영어 과외로 번 돈을 흔쾌히 저에게 빌려줬습니다. 물론 저는 한 달 안으로 빌린 돈은 무조건 갚아주겠다는 조건이었죠.

돈을 빌려 특강료를 내자마자 어처구니없게 입영통지서가 나왔습니다. 저는 불과 열흘 만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돌려받은 수강료는 다른 곳에 쓰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레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년을 방황하며 헛되이 보냈던 시절도 답답했고, 영장이 나오자마자 그 짧은 기간에 군대에 간답시고 흥청망청 돈을 써버리고 만 것입니다. 휴대전화 없이 서로 집 전화로만 연락하던 시기였는데 저는 돈을 갚지 않고 연락도 없이 입대해버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휴가 때나 제대 후라도 상황을 설명하고 빌린 돈을 갚으면 되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당시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뭐에 홀린 듯, 연락해서 돈을 갚겠다고 전화하면 될 것을. 돈 20만 원 때문에 선후배 간 오랜 우정을 깨버렸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제가 한심하고 후회스럽습니다. 후배가 허락한다면 정식으로 사과하고 빚진 제가 꼭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후배님 부끄러운 선배를 용서해주세요. 돌이켜보니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방황하던 시기였던 거 같고, 가장 이기적인 나였네요. 하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그 20만 원 때문에 일방적으로 우리 인연을 끊은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합니다.”

선배가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