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화마에 500년 된 향나무 지킨 ‘당산나무 할아버지’ 이재욱씨
‘나무만은 살려야겠다’ 생각에 소방로 긴급정리
노거수 보호 공로 인정받아 문화재청 표창 받아
 

“나무 앞으로 바로 물차를 댈 수 있도록 해 놓겠습니다. 바로 잔불을 진압하지 않으면 나무가 위험하니 곧장 마을로 들어오라고 전해주세요”

3월5일 새벽. 경북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울진 화성리 향나무’ 주변은 일촉즉발 불길로 에워싸여 주변엔 긴장감마저 돌았다. 동해안 산불이 확산되면서 마을까지 화마가 쳐들어와 인명 피해는 물론 500년 이상 된 향나무가 불탈 위기에 처했던 것. 마을 주민들은 잽싸게 불길을 피했을지라도 화성리 이장 이재욱씨(59) 만은 노거수(수령이 오래된 거목)인 향나무 근처를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이씨는 “갑자기 들이 닥친 불로 눈앞이 캄캄했지만 나무만은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긴급히 소방차 길을 터놓게 했다”면서 “선조 때부터 지켜 온 나무를 잃는다면 우리 삶과 이야기도 다 사라지는 것 같아 지켜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씨는 향나무를 끝까지 지킨 덕분에 공로도 인정받았다. 9일 정부대전청사 문화재청에서 표창을 받았다. 문화재청이 올해 처음 도입한 ‘당산나무 할아버지’에 뽑혀서다. 당산나무 할아버지는 지역에 있는 자연유산을 보존·관리·활용하는 데 도움 주는 마을 대표를 일컫는다. 전국에 산재한 171개의 노거수 한 그루당 지역을 고려해 한 명씩 배정됐다. 이들은 평소에 나무를 지켜보며 잎 마름 현상은 없는지, 언 피해 현상은 없는지 등을 확인한다.

이들의 활동은 다른 지역에 귀감이 되고 있다. 올 3월 대규모 산불 조기 진압에 도움 주며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는가 하면 전국 곳곳에서 묵묵히 활동하던 이들의 모습이 비로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문화재청의 발빠른 위기대응 모습도 눈에 띈다. 마을 진입 하루 전인 3월4일 화성리까지 불이 번질 것을 예상하고 천연기념물 보호를 위해 당산나무 할아버지인 이씨에게 신속히 연락을 취했다. 이씨는 “전화받기 전 안그래도 불길이 워낙 종잡을 수 없어 향나무 근처에서 예찰하고 있었다”며 “나무 주변에 마른 풀이나 나뭇가지 같은 검불을 치우며 소방차가 빨리 들어올 수 있도록 좁은 도로도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과 당산나무 할아버지가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긴밀히 대응한 결과 불길은 다행히 향나무 30ｍ 앞에서 극적으로 진압됐다. 그는 “청사가 대전에 있어서 긴급하게 현장에 올 수가 없잖아요. 우리에게 급박하게 연락한 건데 제대로 협력 대응한 결과인 셈이죠! 하하.”

한편 ‘울진 화성리 향나무’는 1982년 천연기념물 제312호로 지정됐다. 수령 500년에 높이 14ｍ, 둘레가 4.47ｍ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주민들도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 매년 굿과 제도 지낼 정도로 각별하다고 했다.

이재욱 이장 외에도 경북 울진 수산리 ‘굴참나무’를 지킨 황운씨(59), 행곡리 ‘처진소나무’를 보호한 백창호씨(68)가 함께 수상했다. 이들 모두는 “누구든 주변에 있었으면 우리처럼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마을을 수백년 동안 지켜준 나무가 고맙기도 하고 후대에 꼭 물려줘야 한다는 간절한 생각만 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