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이야기 연극배우 홍영란·최길환·변진경씨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이야기 할머니)로 활동 중인 변진경(왼쪽부터), 홍영란, 최길환 씨가 서울 종로구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서울사무소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09.17. xconfind@newsis.com"왜 이렇게 시끄러운 것이냐. 도대체 집중이 되지 않는구나." "대감마님~. 아침부터 이징 도련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꽃받침 포즈를 하고, 손가락 하트를 만들던 이들이 동화 구연을 해달라는 요청에 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어색함도 잠시 뿐 동화 구연은 진지했다. 눈가에 고운 잔주름을 가진 60대 여성들의 이야기 속으로 스르륵 빠져들었다.

지난 15일 종로구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서울사무소에서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이야기 할머니)로 활동 중인 홍영란(66)·최길환(68)·변진경(63)씨를 만났다. 성우로, 고등학교 가정교사로, 음악강사로 활동해온 이들은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활력과 보람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었다.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학진흥원이 함께 추진하는 사업으로, 전통 무릎 교육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노년 여성들이 옛이야기를 유아들에게 전하는 프로젝트다. 이를 통해 조손세대간 소통, 유아 창의력 함양, 고령인구 사회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문체부는 전통 이야기를 새로운 한류로 진흥하기 위해 '이야기 할머니'라는 명칭을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로 바꾸고 사업을 다각적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성우 홍영란씨는 올해부터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앤에서 '다이애나'역을, 개구리 왕눈이에서 '아름이'역을, 보노보노에서 '포로리'역을, 영심이에서 '오순심', '장영란'역을 맡았던 그는 요즘 아이들을 만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던 옛 꿈을 이룬 기분이다.

"고등학교 때 연극을 했는데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손숙씨 정도나 대형극장에 올랐고 대부분 여자배우들은 소극장 연극을 할 때죠. 체구가 작아 소극장 배우 밖에 못하겠다는 말을 듣고 포기했어요. 1979년에 TBC에 성우로 입사해 1980년 방송통폐합이 되며 KBS로 갔고 40년 이상 성우로 활동했어요. 더빙이 없어지면서 일은 점점 줄었죠. '검정고무신'이 마지막이었나 '알라딘' 자스민역이 마지막이었나 모르겠네요."

그는 장애인들을 위한 오디오북 제작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아이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를 알게 됐다. 성우 경력이 40년이 넘지만 진입장벽이 낮지는 않았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시험을 쳐 합격한 후 지난 1년간 교육을 받았다. 올해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한 후에도 매번 직접 동화를 녹음해 귀로 들으며 동화를 달달 외운다.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이야기 할머니)로 활동 중인 변진경(왼쪽부터), 홍영란, 최길환 씨가 서울 종로구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서울사무소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09.17. xconfind@newsis.com"서울은 경쟁률이 높아요. 양천구에서 딱 두 사람이 됐는데 뽑혔죠. 이야기를 전하며 감정이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해요. 배역이 화가 났는 지, 슬픈 지 마음 상태를 생각하며 정확하게 톤을 잡고 구연하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모두가 집중해요. 오늘 오전에도 구연을 하고 왔는데 아이들이 이야기에 푹 빠져서 '앵콜해줘요, 더 해줘요' 하더라고요. 활기를 받으니 요즘 얼굴이 환해지고, 예뻐졌다는 말도 들어요. 얼마 전 박보균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저희를 실버 배우라고 불러줘 반가웠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정말 아이들 앞에서 연극을 하고 있더라고요."
 

"아이들에게 20분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준비는 일주일 내내 해요. 이 나이에 동화책 한 권을 외운다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매년 30여개의 동화를 외워요. 동화를 달달 외우고, 감정을 넣고, 연습도 해보고, 아이들을 만나기 전엔 꼭 남편과 딸 앞에서 20분 동안 구연을 해요. 10년 동안 그랬죠. 우리 남편이 10년간 제가 아이들에게 읽어준 동화를 다 알아요."

최길환씨는 10년째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로 활동 중이다. 결혼 전 고등학교 가정교사였던 그는 결혼 후 직장을 그만뒀고, 30년 가까이 주부로 지냈다. 이후 중학교에서 상담 자원봉사를 하다 우연한 기회에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를 알게 됐다.

"구청 교육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참가자분에게 한 번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이야기를 듣는데 잘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드라마를 보고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다들 집중하고, 말하는 걸 좋아해 '너는 물에 빠지면 입만 뜰 거다'라는 말도 들었거든요."

1년간의 교육을 거쳐 2013년 상담 첫 해에 '책을 만 번이나 읽은 아이, 김득신'을 구연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6살 아이가 동화를 다 듣더니 다가와서 '저도 책 많이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될래요'하더라고요.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영향을 주는구나 감동했어요. 그 아이가 지금 어떻게 컸을 지 궁금하네요."

최길환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싸우던 아이들이 화해하고, 집중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이야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10년간 활동을 이어왔다. "일주일 내내 동화를 외우고, 여행 한 번 가려고 해도 일정을 비우기 힘들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신나요. 제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죠."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실버 이야기 연극배우(이야기 할머니)로 활동 중인 최길환(왼쪽부터), 홍영란, 변진경 씨가 서울 종로구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서울사무소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아이들이 그려준 그림엽서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09.17. xconfind@newsis.com

변진경씨는 청년시절 첼로 등 음악강사를 하다 결혼 후 남편과 학원을 운영하며 세 아이를 키워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큰 후에는 '생명의전화'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삶이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3, 4시간씩 들어주는 일이었다.

"전화로 '약 먹었어요. 저 죽어요.'라고 말하는 이들을 살려보려고 애쓰는 일이었어요. 대부분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고, 자존감이 낮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이었어요. 그 무렵 '이야기 할머니'를 알게 됐어요. 제가 상담심리학을 전공해 유아기에 형성되는 인격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거든요. 어린시절 형성되는 인성과 성격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겠구나, 아이들에게 세상을 잘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 줘야겠구나 생각했어요."

2020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그는 아이들을 만날 때 늘 곱게 한복을 차려 입는다. 예쁜 옷을 입고 가면 좋아할 아이들이 눈에 보여 대충 입고 갈 수 없다. "이렇게 입고 가면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고, 옷을 만져보고 싶어해요. 아이들이 즐거워하니 저도 행복해져요."

함께 활동을 하는 동료들과의 우정도 끈끈하다. "동기 단톡방, 지역 단톡방, 교육을 함께 받았던 분들 등 톡방이 4개 정도 돼요. 다들 너무 좋은 분들이에요.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이런 분들을 만나고 교류하겠어요. 저희 동기 중에는 시작하는 해에 암 진단을 받아서 2년 정도 활동을 못하고, 투병 후에 올해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 있어요. 이분이 '날마다 감동'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홍영란·최길환·변진경씨의 보물은 아이들이 삐뚤빼뚤 그려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담은 엽서와 그림들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보람이 차오르고, 자부심을 느낀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사랑이잖아요.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어요."(홍영란) "시작한 마음과 똑같이 계속 아이들을 사랑해주고, 보듬어주고 이야기해줄 생각입니다."(최길환)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도 이야기들 들려주고 싶어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사업이니 계속 확장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변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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