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목소리, 서울 말씨에 주변 권유…울산시각장애인복지관 개관 때 봉사
'울산 명예의 전당' 올라…"50세 시작한 봉사, 내 인생 가장 기특한 결정" 

시각장애인 도서 녹음 봉사하는 이영숙 씨 [울산시각장애인복지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점자를 모르시는 분, 혹은 점자책이 없어 독서를 못 하는 분들께 제가 눈이 돼드리는 거죠. 대단한 것 없는 능력이지만, 많은 시각장애인분이 제 목소리로 독서를 즐기고 책을 접한다는 보람에 힘든 줄 모르고 봉사하고 있어요."

이영숙(71) 씨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 녹음 봉사활동을 약 20년째 이어오고 있다.

'목소리가 좋다'거나 '말을 예쁘게 한다'는 주변의 평가가 "도서 녹음을 해보라"는 권유로 이어졌고, 그렇게 시작된 봉사활동은 이제 그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일상이 됐다.

실제로 이씨와 대화해보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목소리가 맑고, 사투리가 없는 서울 말씨는 전문 방송인이 떠오를 정도다.

지금까지 녹음한 도서는 총량을 집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아무래도 에세이나 시집 녹음이 가장 편한 것 같아요. 하지만 시각장애인 분들이 원하는 책들을 위주로 하다 보면, 거의 모든 종류의 책을 다 경험하게 됩니다. 소설은 등장인물에 따라 목소리 연기를 하다 보니, 마치 성우처럼 녹음합니다. 시험을 위한 문제집은 전문적인 영역이어서 어려움이 있고요. 한번은 일본어로 된 책을 녹음해 달라는 의뢰가 있어서, 일본어를 잘하시는 분의 번역을 보면서 제가 녹음한 적도 있어요."
 

시각장애인 대상 사진교실 봉사하는 이영숙 씨(왼쪽 세 번째) [울산시각장애인복지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 출신인 이씨는 결혼하면서 1974년 울산에 정착했다.

향교에서 전교(典校·향교의 책임자)를 맡았던 아버지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한문과 붓글씨에 능했던 그는, 결혼 후 18년간 서예학원을 운영했다.

다만 가정과 학원을 꾸리는 데 열중하는 와중에도 '늦기 전에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50세가 된 2000년, 이씨는 학원을 정리하고 별러왔던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외환위기 등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남편, 원하던 대학에 진학한 두 자녀에게 감사한 마음이 컸는데, 그래서 더더욱 봉사활동으로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는 결심이 확고해졌다.

홀몸노인 도시락 배달, 장애인학교 급식, 어르신 문해교육, 요양병원 환자 목욕까지.

다 못한 숙제를 몰아서 하듯 이씨는 열성을 다해 봉사에 임했다.

그러던 중 2002년 울산시각장애인복지관이 개관했고, 이씨의 밝은 성격과 맑은 목소리를 눈여겨본 지인들이 도서 녹음 봉사를 권했다.

복지관에서 시작된 녹음 봉사는 시각장애인 정서 지원을 위한 전화 모니터링 봉사로 이어졌다.

사고나 질병 등으로 시력을 잃은 중도 장애인들은 큰 좌절감을 안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씨는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전화해 안부를 살피고 심리 회복을 도왔다.

모니터링 봉사에서도 그의 긍정적인 성격과 편안한 목소리는 강점이 됐다.

"중도 장애인들의 절망감을 비장애인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죽지 못해 산다' 등의 부정적인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 심경을 이해하면서도, 저는 꾸준히 힘을 드리는 말벗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때로는 찾아뵙고 식사도 하면서 정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 노력이 1년쯤 이어지면, 그분들도 차츰 닫힌 마음을 여셨어요. 비관과 불만으로 가득했던 분들이, 안부를 물으면 '너무 건강하다'고 안심시키거나 도리어 제 안부를 물어봐 주실 정도로 긍정적이고 여유롭게 변하셨죠."
 

경로당에서 봉사하는 이영숙 씨 [울산시각장애인복지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씨는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울산시자원봉사센터가 선정하는 '2022년 울산 자원봉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는 봉사활동에서 얻은 에너지를 다양한 자기 계발의 원동력으로 삼기도 했다.

우선 전문적인 봉사활동을 위해 야간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평소 좋아했던 시 낭송을 배워 지금은 시 낭송 지도자 겸 유튜버로도 활약하고 있다.

시와 동시를 발표한 울산문인협회 소속 작가이기도 하고, 무대에 오른 연극배우 타이틀도 보유하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사에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이씨는,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봉사활동이 선사하는 충만한 기쁨을 만끽하라고 조언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저는 50세에 봉사를 시작하면서, 너무 늦었다는 조급함이 있었어요. 되돌아보면 어리석었습니다. 제가 지금도 너끈하게 봉사활동을 하는데, 50세면 아주 젊었던 거죠. 오히려 아주 젊을 때는 일이나 가정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을 수 있어요. 지금 나이 때문에 봉사를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얼굴의 검버섯이나 주름살은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인생의 꽃이고 훈장입니다. 저는 봉사활동의 길로 들어선 당시의 저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하고 칭찬해주고 싶어요. 언젠가 눈을 감는 순간에도 가장 뿌듯한 발자국이 될 겁니다. 여러분들도 용기를 내세요."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