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맙습니다 - 김봉한 전 장충고 교장선생님

내가 태어나자마자 8·15광복을 맞았고 온 국민은 새 시대 물결에 부응하는 열화와 같은 기대와 소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정치지도자들의 이념 갈등으로 급기야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으로 국토는 폐허가 됐다. 당장 먹고사는 게 문제였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그래도 ‘배워야 산다’는 일념으로 시골에서 논밭 팔고 송아지 팔아 서울로 보내 자녀 교육하기에 바빴다

그렇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고교에 다니면서 등록금이 없어 고생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국공립고와 명문사립학교 재단은 가까스로 홀로서기를 하였지만, 나머지 사립학교는 오로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겨우 유지하였으니 그 실상은 눈물겨웠다.

대구에서 다닌 중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은 졸업생들에게 ‘기술을 배워야 산다. 장차 나라를 일으키는 데는 기술밖에 없다’고 주창하셨다. 그래서 나는 서울의 명문이라는 대방동 S공고에 진학했다. 6개월을 다니면서 계속 실습 위주로 진행하는 기술교육 프로그램이 나와는 맞지 않았고, 이렇게 하다간 장차의 꿈인 대학진학이 요원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퇴를 결심했다. 그리고 서울 장충동에 있는 천주교재단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몇 개월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집안 사정이 기울어지자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시절 우리 국민의 유일한 낙이 신문밖에 없었던 터였다.

도서관에서 만난 친구 L(후일 고려대 식품공학 박사)이 어느 날 ‘우리 내년까지 기다리지 말고 인문 고등학교로 편입해 대학진학을 하자’는 제안에 동의하고 장충고로 편입했다. 그때 많은 급우가 나처럼 이런저런 사정으로 어렵게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어려운 환경과 열악한 교육 여건 속에서도 다들 열심히 공부했지만, 등록금을 제때 못내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이때 잊을 수 없는 분이 오늘의 주인공 담임선생이시다.

김봉한 선생님은 청주고등보통학교와 서울상대를 졸업한 후 장충고에서 영어교사로 봉직하셨다. 큰 키에 하얀 얼굴, 까만 뿔테 안경을 끼시고 차분하게 말씀하시며 인품이 좋으셨다. 늘 학생들의 등록금(월사금) 미납을 걱정하시고 고민이 많으셨다. 조석으로 교장 선생님의 화급한 등록금 재촉에 종례시간에 오셔서 별말씀도 못 하시고 교무실로 가는 모습을 자주 목도했다. 학생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어 재촉한들 나올 게 없는데 푸념하시는 걸 보면서 학비를 못 낸 급우들은 더 이상 학교에 나올 면목이 없어 등교를 포기했다. 선생님은 다음 날 반드시 편지를 써 반장을 시켜 집으로 보냈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 무조건 학교에는 나오너라. 학비를 못 내도 수업은 언제나 계속된다’면서 학비를 못 낸 학생이 학교는 못 가고 선생님 댁으로 가면 반갑게 맞아주시며 학생과 겸상 저녁을 하시면서 따뜻한 덕담과 함께 학생을 다독거리고 격려해 주셨다.

고교 졸업 후 급우들이 선생님의 그날 일들을 잊지 못하고 매년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을 모신 지 어느새 50년이 됐다. 스승의 날이면 20여 명의 급우가 서울 종로 동숭동 한식집에 선생님을 모시고 선물을 드리며 큰절을 올리고 ‘스승의 노래’를 합창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눈시울을 붉히시며 내가 해준 것이 없는데 해마다 과분한 대접을 받으니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모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봉직하다 정년을 마치셨지만 한 해도 스승의 날 행사를 빠진 적이 없다. 올해 103세, 장수하시니 이제 스승과 제자가 함께 세월의 무게를 견디느라 힘들다. 거동이 불편하자 제자들이 선생님 댁 부근 식당에서 모시다가 코로나19 정국으로 바깥외출이 어려워지면서 선생님의 아들, 며느리, 딸들이 음식을 마련해 우리를 집으로 초대하고 있다.

선생님의 장수비결은 아주 특별하시다. 평생을 맥주 컵에 막소주 3분의 1을 붓고 더운물을 채워 희석해 드시는데 100세가 넘으신 지금도 여전하시다는 아들의 전갈이다. 최근 건강이 위중해 병원 응급실에 가셨는데 이틀 후 호전되자 산소호흡기를 빼달라 하소연하며 어서 집에 가자 하셔서 댁으로 모셨다고 한다. 나이 많아 오래 사는 것도 부끄러운데 산소호흡기 부착이 창피하다 하신다.

제자들에게 평생 큰 나무가 되어주신 참 스승. 올해도 스승의 노래를 합창하며 카네이션을 달아 드릴 그날을 기다립니다. 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전경배(한국시협회원·공간시 상임시인)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