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땅에서 눈 감을 수만 있다면 … ” | news | 2008-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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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일(全秉一ㆍ79)씨는 지난밤 꿈에서도 ‘꽃섬’을 봤다. 새벽녁에 몸을 일으키니 베갯잇이 흥건하다. 한숨을 쉬며 어둑어둑한 창밖을 내다본다. 고향땅을 떠나온지 58년째. 고향 마을의 모습은 너무나도 또렷하다. 요즘 들어 더욱 생생하게 나타나곤 하는 고향이 그를 새벽마다 울린다. 한국전쟁 때 혈혈단신으로 피난을 떠났다 남의 나라 군인이 돼 수십년을 떠돌았던 자신의 운명이 너무도 기구하다는 생각때문이다. 전씨는 수십년 세월의 회한은 지울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고향에 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함경남도 함주군 주북면 흥덕리.” 전씨는 고향을 묻자 잠시도 머뭇거림없이 답한다. 수천 수만번을 되뇌여봤던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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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가 흥덕리를 떠난 건 스물한살 때인 1950년 10월이었다. 고향 근처에서 중공군과 연합군이 치열한 전투를 치를 무렵이다. 함흥군청에서 일하던 그는 시가지에서 콩볶듯 총소리가 요란하던 날 꽃섬으로 나가 배에 올랐다. “지금 안 떠나면 개죽음을 당한다”는 친구의 손에 끌려서였다. 다른 피란민들과 함께 주문진에 상륙한 그는 다시 포항을 거쳐 대구까지 내려갔다. 당장 살 길이 막막해진 그는 친구들과 함께 제2방위군 집결소로 갔다. 물자 수송을 담당하는 군인이 되면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전쟁때 군은 가장 끗발도 좋은 직업이었던 것이다. 3개월간 교육을 마치고 그가 배치된 곳은 유엔 연합군의 프랑스 대대였다. 그 곳에서 프랑스 군인들과 함께 전방에 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러다 다시 전방으로 배속돼 중대본부 행정병으로 일하게 됐다. 프랑스 군도 현지 사정을 잘 아는 한국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전쟁통이라 질서가 안 잡혔던 때문인지 그는 하사라는 계급도 어렵잖게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2년이 훌쩍 지나갔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6형제가 보고싶기는 했지만 그는 “전쟁이 얼마나 오래 가겠냐”는 혼잣말로 견뎌냈다.
53년7월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고향은 갈 수 없었다. 이미 남북은 두동강이가 나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남한 땅에 있자니 먹고 살 문제가 또 막막했다. 그 때 친하게 지내던 프랑스 장교 로뱅이 “어차피 고향에는 못 가는데 나와 같이 가보지않겠냐”고 했다. 그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이 터져 베트남군 진압차 떠나려던 참이었다. 전씨는 “살 길이 막막했고 프랑스 사람과도 2년쯤 지나다보니 좀 통하게 되서 무작정 인천부두로 나가 배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프랑스 군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했다. 그는 디엔비엔푸 전선에 배치됐고 베트콩들과 매일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외인부대는 철수하게 된다. 베트남 남쪽으로 넘어와 1년여동안 주둔하다 이번에는 알제리 독립전쟁에 투입됐다. 알제리 독립군을 진압하는게 임무였다. 그 때는 이미 그에게 선택권이 없었다. 외인부대의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57년까지 알제리에 주둔해있던 그는 그 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좋은 소식을 듣게됐다. 4년 이상 군에 근무한 덕분에 프랑스 국적과 함께 군인에 최대의 영예인 ‘군인훈장’(Medaille de militaire)을 받게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일은 반드시 나쁜일과 같이 오는 법, 부대내에서 훈장 품신 등에 경쟁관계였던 몇몇 사병이 “전씨가 알제리 군과 내통한다”는 밀고를 한 것이다. 그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수사선상에 오르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탈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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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몇년을 떠돌아다니다 60년 모로코에서 붙잡혔고 프랑스로 보내진 뒤 군사재판을 거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국적과 군인 훈장 역시 모두 취소됐다. 1년여를 복역한 뒤 아무 것 하나 가진 것 없이 석방된 건 61년6월. 이미 고향땅을 떠나온지 10년이 다 됐다. 그는 “그 때 너무 막막해서 차라리 영창이 그리웠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없었던지 전씨는 외인부대 시절 알고 지내던 사람의 소개로 파리의 밀가루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이 곳에서 10년간 트럭운전기사로 일했다.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주니 더 바랄게 없었다. 72년에는 이 공장 부설 제빵학교의 직원으로 들어간다. 빵 만드는 기술도 배웠고 새 학생들의 뒷바라지하는 역할을 했다. 당장 허기를 면하면서 그는 한국땅이 그리워졌다. 주 프랑스 한국 대사관을 이따금씩 찾았다. 한국 신문을 뒤적거리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20여년만에 달라진 세상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나 남북이 대치하던 당시 분위기로는 섣불리 남한에도 북한에도 문을 두드리기 어려웠다고 한다. 통일될 날 만을 기다리던 그는 제빵학교에서 2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
가정도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사람도 한국 사람도 아닌 무국적자인데다 가진 것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미래를 맡길 사람이 있을리 없었다. 90년 제빵학교에서 퇴직한 뒤로 파리 근교의 부르도네에 살고 있다. 프랑스 가정에서 하숙을 한다. 전씨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할때는 잘 몰랐는데 은퇴후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고향 생각을 하게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여기저기 물었지만 국적이 없어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여권을 내줄 나라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의 프랑스 체류증에는 ‘북한인’으로 보훈증에는 ‘남한인’으로 적혀있다. 전씨는 요즘 들어 부쩍 근력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기다리다간 고향을 꿈에서나 보다 이역만리에서 눈을 감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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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는 “나는 남한인도 아니고 북한인도 아니지만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지않냐”고 호소했다. 그는 “이제는 남북이 왕래도 하고 하니 남한으로 가서 고향땅도 한 번 가보고 싶다.그러면 여한이 없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한국전쟁이 만든 기구한 운명의 58년은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는 세시간여를 참던 눈물을 끝내 흘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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