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꼼짝 못하니 죽을 맛 말벗이 가장 고마워” | news | 2008-12-19 |
수습기자들의 체험 르포-마포구 홀몸노인 가정도우미
지난 15일 오전 10시. 가정도우미 박순자씨(60)를 따라서 서울 마포구 창전동 황성도 할아버지(84)의 집을 찾았다. 화장실도 없이 좁은 부엌만 딸린 9.9㎡(3평) 크기.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 단칸방이다. 석유 냄새가 확 끼쳤다. 방안 석유난로 위에 올려진 주전자에선 물이 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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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한 독거노인의 단칸방에서 경향신문 김향미 기자가 방 청소를 하며 할아버지와 대화하고 있다.|정지윤기자 |
“겨울에는 죽을 맛이야. 꼼짝을 못 하니까. 내 몸이 자유롭질 못 하니 이렇게 찾아와주는 도우미들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지.”
마포구청에서 활동하는 가정도우미 박씨는 매일 3~4명의 기초생활수급 대상 홀몸 노인들을 방문한다. 마포구에서는 박씨 등 12명이 관내 80여명의 독거노인들을 보살피고 있다. 시급은 3000원 남짓. 13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 박씨는 “밥·빨래·청소·목욕 돕기 뿐 아니라 반찬거리와 병원 검진일까지 일일이 챙겨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방 청소를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앉아 있던 녹색 담요를 내다 터니 10년은 묵은 것 같은 먼지가 자욱했다. 탁자 위에는 약 봉지가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혼자다. 평양에서 철도 기관사로 일하다 6·25 때 혈혈단신 월남했다. 북한에 부모와 여동생, 남동생이 있는데 살아생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북한에 약혼녀를 두고 왔다는 이유에서다. 월남 이후 종로 낙원상가, 공덕동 등지에서 고물상을 하며 살았다. 지금은 월 40만원 가량의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이 수입의 전부다. 방세·전기세·식비만으로도 빠듯하다.
중풍을 앓아 거동이 불편한 황 할아버지는 “내 몸 아플 땐 더 외롭고 사람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도우미 박씨가 돼지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치아가 없는 할아버지가 맛을 느끼려면 돼지고기를 큼지막하게 썰어야 한다”고 했다.
좁다란 부엌에 서서 설거지를 했다. 졸졸 흘러나오는 수돗물은 살이 에이도록 차가웠다.
낮 12시쯤 한옥순(85)·은희축(76) 할머니가 사는 집으로 갔다. 좁은 방에 옷가지며 잡동사니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박씨는 “한 할머니는 늘 이래요. 치워도 돌아서면 또 이렇다니까”라고 했다. 얼른 방을 정리한 뒤 반찬 양념으로 두고 먹을 마늘을 깠다. 셋이 둘러 앉으니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할머니가 “고맙다”며 손에 귤 하나를 쥐어줬다. 무엇이 고마우실까. 그저 다녀갔을 뿐인데.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
옆방의 은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다. 도우미 박씨는 “가끔 나를 도둑으로 오인할 때가 있다”며 웃었다. 할머니가 “손톱 좀 깎아줘”라며 건네는 게 가위였다. 손톱에 봉숭아 물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박씨는 냉장고를 열어 남은 음식을 살피고 빨랫감들을 확인했다. 그제야 은 할머니는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냉기 가득한 방에 찬바람이라도 들까봐 창문을 꼼꼼히 닫고 나왔다.
오후 3시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송영란 할머니(84)의 집이었다. 비좁은 13.2㎡(4평)짜리 방에 모로 누워 TV를 보던 할머니는 달력을 가리키며 “다음 주에 검진 받으러 병원 갈 날짜를 맞추자”고 했다. 노인들에게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게 하는 것은 도우미가 빼먹어선 안될 일이다.
할머니는 “빨래는 다음에 내놓겠다”며 “오늘은 말벗이나 좀 돼 달라”고 했다. 노인들은 말벗이 가장 그리운 것 같았다.
오후 5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박씨는 “그동안 보살핀 노인 중 50여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어떤 간호사는 남몰래 할머니들을 찾아와 치료하고 목욕도 시켜준다고 했다. 매달 10㎏짜리 쌀 한 1포대씩을 보내오는 얼굴없는 후원가도 있다. 박씨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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