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심 알리는 데 이유 있나요…“류관순은 나의 운명” | news | 2011-06-13 |
어느 시대든 그 나라 사람들에겐 민족정신, 시대정신이 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물질만능, 능력중심시대에선 나라와 고장을 사랑하는 애국심이나 시민정신은 찾아 보기 힘들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를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의 아픔을 외면하는 일도 있다. 이런 시대에 나라사랑 정신 알리기에 시간과 열정을 쏟는 사람이 있다. 류관순 열사 고향인 천안에 정착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전파하며 살다 보니 어느새 나이는 칠순을 훌쩍 넘어 노인이 됐다.
천안시 사적관리소서 홍보활동
박인숙씨는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알리기 위한 대회를 준비하며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 아이들에게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류관순 열사 고향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인재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게 그의 유일한 바람이다. [조영회 기자]
8일 오전. 한 손에 태극기를 든 박인숙(73)씨가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 있는 천안시 사적관리소를 찾았다. 박씨가 가장 먼저 간 곳은 추모각에 봉안된 류 열사 영정 앞. 몇 분간 기도를 올린 박씨는 ‘류관순 얼은 인간존엄의 세계적 영웅 정신’이라고 새겨진 어깨띠를 몸에 두르고 늘 그래왔듯 주차장으로 향했다.
사적관리소 주차장에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조용했던 주차장 광장은 초등학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천안시 사적관리소는 류 열사의 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인근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자주 찾는 체험학습장이다.
박씨가 빠른 걸음으로 아이들 속으로 사라졌다. 추모각으로 다시 올라온 박씨는 아이들에게 홍보물을 나눠주며 류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 나이에 이화학당에 입학했을 때 류관순 열사를 처음 알게 됐어요. 류 열사는 일제시대에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참을 수 없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을 외쳤어요. 빼앗긴 대한민국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여러분에게도 류 열사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훌륭한 인재가 되는 것도 좋지만 류 열사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우리 부모님이 있고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요.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꼭 되어야 해요. 알겠죠?” 박씨의 말에 아이들이 하나 같이 “네”하며 큰소리로 답했다.
박씨는 체험학습 시기가 되면 언제나 이곳을 찾는다. 아이들에게 류 열사의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태극기와 나라사랑을 알리는 홍보물이 들려 있다.
일도 봉사도 애국심 하나로 실천
류관순 열사 홍보물을 나눠 주는 박인숙씨.
영어교사로 퇴직한 박씨는 류 열사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류관순사모동호회를 조직했고 류관순정신계승사업회를 설립했다. 문화재청 류관순 유적 지킴이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독립기념관과 천안박물관에서 문화유적 해설사로 일하며 방문객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심어 주고 있다.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씨는 20대만 해도 평범한 은행원이었다. 하지만 늘 마음속엔 류관순을 닮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1975년 그에게 기회가 왔고 은행원에서 영어교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고향을 떠나 천안과 인연을 맺었다.
천안에 오자마자 그는 큰 실망을 느꼈다. 류 열사 사적지 때문이었다. 류관순 추모 79주기를 맞아 걸스카웃을 인솔해 사적지를 찾은 날. 산자락 아래엔 허름한 팔각정 하나뿐이었고 맨바닥엔 풀 한 포기 없었다. 추모 현수막이 사적지임을 알리는 전부였다. 사적지가 초라하게 방치되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빠진 박씨는 며칠 동안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그는 류 열사의 애국정신을 알리기 위해 모범을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학교나 직장 동아리에서 봉사활동을 할 땐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았다. 중3 담임시절엔 가정환경이 열악한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미용기술을 가르쳤다. 기술을 습득시켜 하루빨리 취직시키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월급은 고스란히 미용학원 강사들에게 들어갔다.
당시 그의 가정엔 2명의 친자식 외에도 2명의 자녀가 더 있었다. 고아원으로부터 위탁 받은 아이들이었다. 전쟁으로 집도 친척도 없는 외로운 청소년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98년엔 천안여성회관자치회장을 맡아 첫 바자회를 개최했다. 참기름과 떡을 팔아 모은 돈은 소년소녀가장과 독거노인을 돕는데 사용했다. 해체되는 가정을 위해 가족상담·성상담센터를 운영하기도 했다. 2001년엔 천안금빛여가복지노인대학(관허 제2호)을 열어 18개 과목을 개설, 애국정신과 전통예절을 가르쳤다.
2002년 류관순 오페라에 감명 받아
박씨에게 2002년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해다. 류관순 탄신 100주기를 맞아 천안시민문화회관에서 청주시립무용단이 류관순을 주제로 오페라를 열었다. 그는 공연을 보며 깊은 감명에 빠져 있을 때 옆 좌석에 앉은 7살 아이가 눈물을 훔치며 엄마에게 한 번 더 보자고 조르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기르기 위한 대회를 열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해 천안지역 학교 대표 4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류관순 사모 글짓기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듬해엔 글짓기 대회와 사생대회를 함께 열었다. 지인 몇몇이 모여 류관순을 사모하는 동호회도 만들었다.
대회를 치르기 위해 현지 답사, 주제 발표, 심사위원 조직, 기념품 제작, 전세버스 대여 등 모든 일을 자비로 진행했다. 누구 하나 도움을 준 이는 없었다. 2003년 10월 그에게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쳤다. 예정된 대회를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행사 준비로 새벽에 잠들어 일어나 보니 며칠 간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다는 걸 알았다. 백내장에 과로까지 겹쳐 수술을 받아야 했다.
눈을 혹사시키지 말라는 의사 만류에도 수술 하루 만에 일어나 다시 대회를 준비했고 무사히 마쳤다. 2년 뒤엔 영어 말하기 대회를 준비하던 중 목욕탕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그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순간에도 아이들에게 류 열사의 나라정신을 알리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청소년 영어 말하기 대회는 2005년 천안교육청 특색사업으로 선정됐고 5명에 불과했던 류관순정신계승사업회 회원은 2년 여 만에 1000여 명으로 늘었다. 그는 2008년부턴 해마다 홍보물을 만들어(4000~8000장) 류 열사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3·1절 봉화제나 추모제를 비롯해 독립기념관, 천안박물관, 천안시 사적관리소에서 정기적인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요즘 새로운 소망이 생겼다.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을 대표하듯 천안 흑성산에 류관순 동상을 세우고 그곳에 역사관광 등산로를 만들어 대한민국을 알리고 싶다는 게 그의 마지막 소원이다.
박인숙씨는 “류관순 열사 남동생 류인석의 부인(朴寅淑) 이름과 내 이름이 같은 것을 보면 류 열사와는 큰 인연임에 틀림없다(웃음)”며 “나라의 독립을 외치며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바친 그 정신을 아이들이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족정신=한 민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개성(민족성)이나, 한 민족이 사회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문화적 특성.
시대정신=한 시대의 문화적 소산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나 양식(樣式) 또는 이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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