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돕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 이번 설 역시 어려운 이웃이 더 따뜻했다.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옛 동사무소)에는 연말이면 꼭 익명의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근처 어디엔가 박스가 있다는 제보자의 말을 듣고 주민센터 직원들이 알려준 곳으로 나가 수거해 온다.
 
박스 안에는 지폐와 동전을 합쳐 수천만 원이 들어있고 소년소녀가장을 위로하는 편지도 담겼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기부자가 사회 소외계층과 불우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다. 

이런 식으로 17년째 기부한 액수가 5억 원에 달한다. 그래서 익명의 이 기부자는 전주의 ‘얼굴없는 천사’로 전국에서 알아준다.

이번 설에도 쓸쓸하게 지내는 소외계층 등 어려운 이웃에게 온정을 나누는 기부천사들이 있어 따뜻하다. 

경기 위축으로 자기 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남을 돕고 사는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귀감이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한 여성은 지난해 말 강원 철원군 서면사무소에 "홀몸노인들을 위한 연료비로 써 달라"며 100만 원을 쾌척하는 등 3년째 성금을 보내고 있으며 지난 12에는 대전 동구 판암1동 주민센터에 10㎏ 짜리 쌀 50자루를 전달한 50대 남성도 "설에 거동이 불편하거나 홀로 사는 어르신들에게 전해주면 고맙겠다"고 부탁했다.

인천 동구청과 남동구청, 부평구청에 5000만 원씩 모두 1억5000만 원을 기부한 남성은 "홀몸노인과 소년소녀 가장들을 위해 써 달라"고 이름 밝히기를 꺼렸다.
 

인천톨게이트에서도 지난 3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40대 남성이 "좋은 일에 쓰라"며 31만여 원이 든 묵직한 동전 꾸러미를 던지고 사라졌으며 광주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5만 원짜리 지폐 20장이 든 봉투를 기탁한 등산복 차림의 노인은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하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몰랐으면 한다"며 차 한잔 하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돌아섰다.

지난 20일 제주시에는 익명의 독지가가 백미 10㎏ 1000포대(2500만 원 상당)를 기탁하는 등 17년째 선행을 베풀고 있다. 

60대 후반인 이 기부자는 2001년부터 설과 추석 때마다 저소득층을 위해 쌀을 보내오는데 지금까지 후원한 양은 백미 1만7800포대로 약 4억5000만 원 어치에 달한다.
 
그는 “고향을 떠나 제주에서 어렵게 살아왔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받은 도움을 사회에 돌려주고 싶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달 초 충북 충주시 소태면사무소에도 익명의 독지가가 쌀과 밀가루 각각 21포씩을 전달했다. 13년째 후원물품을 보내는 이 독지가는 "먹고 살 만한 여건이 되면 잊지 말고 고향 어르신들을 도와 드리라"는 부친의 유언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소태면이 고향인 그의 선친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한때는 남의 집살이를 하면서 농사일을 도와주고 삯을 받아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0일 울산시 동구에 현금 100만 원을 맡긴 기부천사는 하청업체 노동자인 30대 남성이었다.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노동자'라고 밝힌 그는 "회사와 나라 걱정 때문에 즐겁고 행복해야 할 날이 슬펐던 날로 기억되지 않을까 걱정이다"는 메모를 남겼다.
 

전주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익명으로 받은 기부금을 세고 있는 모습

부산 해운대구 반송2동 행정복지센터에도 '동전 천사'가 11년째 어김없이 나타났다. 무인 민원발급기 옆에 놓인 종이상자 2개와 돼지저금통에는 10원, 50원, 100원, 500원짜리 동전이 자그마치 1만2546개나 됐고 금액은 118만4680원이었다. 상자 안에는 '구겨지고 녹슬고 때 묻은 돈일지라도 좋은 곳에 쓸 수 있다'는 글귀가 적힌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한 익명의 기부자는 3년째 라면 600박스씩 1800박스를 전남 해남군청에 보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온정을 베풀었으며 지난 12일에는 8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충남 공주시장실을 찾아가 쪽지와 함께 3000만 원짜리 수표를 비서에게 전달한 뒤 사라졌다.
 
메모지에는 “시내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에게 써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안산의 한 중소기업은 최근 안산시에 1억 원을 익명으로 기부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