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제천 참사 유족 위로/제천지청 최상문 검찰수사관/참사 당시 수사 검사팀 일원 활동/피해자·유족들 아픔 생생히 경험/생계 막막 20대女에 위로금 전달/태백 불우아동돕기 기부 10년째 

지난 13일 청주지검 제천지청에서 만난 최상문 수사관이 지난해 말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참사 당시 수사과정 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뇌리에서 거의 잊힌 존재입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연락도 안 오고. 새로 뽑힌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시·도의원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요. 힘에 겨운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기조차 어렵습니다.”

지난달 말 민동일 충북 제천 화재참사 유족협의회 공동대표와 통화했을 때만 하더라도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지난해 말 참사로 가족 3명을 잃었으니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민 대표는 유족들끼리라도 서로 위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유족협의회 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에서 잊혀간다는 생각에 무력감만 커졌다. 그러니 뭔가를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당연했다.
 

그랬던 그의 목소리가 최근 밝아졌다. “인사해야 할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서는 살짝 웃음이 묻어났다. 올해 초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편지와 함께 위로금을 놓고 간 주인공을 찾았다는 것이다. 유족들에게 큰 위안과 힘을 준 편지였다.

‘얼마 전 고인의 유족 자녀와 잠깐 통화한 적 있습니다… 그 여성 분이 저한테 호소한 힘든 형편이 제 뇌리에 계속 맴돌아 이렇게 글로 전하게 됐습니다… 약소한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이 편지에 약간의 돈을 담아 보내드리오니 이 가족 분에게 꼭 전달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청주지검 제천지청에 근무하는 최상문(43) 수사관이었다.

“이런 분이 계시다니 눈물이 나더군요. 누군가 유족협의회로 연락해 온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다들 그분이 누굴까 궁금했어요. 저희가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편지에 ‘검찰수사관’이라는 신분만 있지 소속이나 이름, 연락처가 전혀 없었어요.”

지난 13일 제천지청에서 만난 최 수사관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특별히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최 수사관은 화재참사 당시 여러 수사팀 중 제천지청 김주혜 검사팀의 일원이었다. 팀원들과 생존 피해자와 유족 40명가량을 조사하면서 외상후스트레장애(PTSD)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들의 아픔을 생생히 경험했다. 삶과 죽음을 그렇게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조사 후에도 20대 초반의 여성 A씨가 잊히질 않았다.

“아버지를 잃고 생계가 막막하다고 하더군요. 어린 남동생이 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당장 일할 상황도 아니라고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검찰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심리적 지원을 받도록 하는 것뿐이었어요. 그러니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A씨는 피해자 유족 중에서 가장 어렸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그에게 A씨가 남 같지 않았다. ‘만일 내가 사고현장에 있었더라면 우리 가족 생계는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아내와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 떠올려봤다.
 

최 수사관은 지난 2월 설을 앞두고 받은 명절 상여금 일부를 봉투에 담아 편지글과 함께 유족협의회 앞으로 보냈다. 편지는 유족협의회가 시청을 통해 희생자 가족관계와 소재지를 파악한 끝에 A씨에게 전달해줬다.

최 수사관의 선행은 사실 처음이 아니다. 검찰직으로 옮기기 전 강원도 태백시청에서 근무하던 시절부터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10년째 기부해오고 있다. 태백지역의 불우 아동을 돕는 데 작은 정성을 보태온 것이다. 평생을 광부로 고단하게 살다간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어린 시절 다정하게 아버지의 손 한번 잡지 못한 아쉬움이 아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끈 것 같다고 한다.

누구나 마음은 어려운 이웃을 향하지만 손길을 내밀어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최 수사관에게 조언을 구했다. “누군가를 돕는다고 말하기에 부끄러운 사람”이라던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동이체를 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한번 해보시죠. 무슨 큰 결심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