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게 폐달을 밟으며 가장 먼저 골인지점을 통과하던 사이클 여제는 지금 병상에 누워있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3km 개인추발),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35.6km 도로독주)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전 여자 사이클 국가대표 이민혜(33) 선수다. 지난 2016년 8월 급성골수성백혈병이 엄습했다. 

고등학생 시절 국가대표가 돼 2개의 금메달을 포함, 아시안게임에서만 7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2008년에 이미 갑상선암을 이겨내며 2년 뒤 자신의 두번째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하는 인간드라마도 썼다. 그러나 두번째 병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수한 메달을 만들어 낸 두 다리는 부어오르고, 수 차례 진행한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은 쇠약해졌다. 

더 아픈 건 마음이다. 금메달을 딸 때는 효자 종목, 눈부신 재기로 잠시 화제를 모았다. 2010년에는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도 참석할 정도였다. 하지만 잠시 지나가는 관심이었다. 땀 흘려서 금메달 따는 것 외에는 가치를 증명할 길 없는 비인기종목 선수가 현실이었다. 

이민혜를 지극 간호하고 있는 어머니 최강희 씨는 눈물이 말라간다. 어머니도 딸과 함께 지난 20년을 달렸다. 일찍 남편을 잃고 두 딸과 함께 고생했다. 어느날 둘째가 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 간신히 구한 중고 자전거 한 대가 희망이었고, 결국 정상에 섰다. 아버지의 사진을 품고 달리는 딸의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던 어머니에게 2년 3개월 전 병원에서 들은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어머니가 더 아픈 건, 위선과 무관심이다. 한국 사이클의 희망이라며 올림픽 메달을 위해 딸을 스위스로 보내 고된 훈련을 시키던 대한사이클연맹 관계자들은 위로 전화 한통, 병문안 한번 없었다. 함께 고생했던 동료 선수들, 그리고 지난해 말까지였던 계약 기간을 지켜 준 음성군청의 도움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지난 5일 이민혜 선수가 입원한 병실로 두 축구 선수가 방문했다. 지난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남자 축구 금메달을 획득한 황현수(FC서울)와 조유민(수원FC)이었다. 김학범 감독을 비롯해 당시 함께 한 대표팀 전원이 당시 금메달 포상금 중 일부를 모아 마련한 1000만원의 후원금과 함께였다. 

왜 사이클과 관계없는 축구 선수들이 나섰을까? 아시안게임 기간 중 나온 국민일보 이경원 기자의 기사가 시작이었다. 남자 축구는 이번 아시안게임 성과의 하이라이트였지만, 한켠에서는 두 차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타 종목 선수의 안타까운 소식을 담은 기사가 적잖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백혈병 투병’ 금메달리스트 이민혜, 중고자전거 타고 이뤄온 꿈 다시 꾸기를

2006 도하아시안게임 3㎞ 개인추발과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35.6㎞ 도로독주의 금메달리스트인 전 여자 사이클 국가대표 이민혜(33)가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다. 힘차게 페달을 밟던 그의 두 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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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은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가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요청을 김학범호에 전달했다. 김학범 감독도 종목은 다르지만 같은 스포츠인으로서 가슴 아프다며 뜻을 같이 했다. 축구협회의 포상금 배분이 정리되고, 최근 선수 개인 별로 여러 기부가 이뤄진 가운데 이민혜 선수에 대한 성금 마련도 선수단 내부에서 진행됐다. 김학범 감독은 “나이 많은 사람이 가면 가족들이 부담스러워 할 거 같다. 선수들이 가는 게 더 좋지 않겠냐”며 뒤로 물러났다.

시즌 중이어서 각자 소속팀으로 흩어진 선수들을 대표해 방문하게 된 황현수, 조유민 두 선수는 처음엔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어설픈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조심스럽고, 부담됐다. 그러나 두 선수가 병실에 도착하자 오히려 이민혜 선수와 그 가족이 밝게 환영하며 두 선수의 표정도 환해졌다. 

이민혜 선수는 먼저 남자 축구 대표팀의 금메달에 축하를 건넸다. “밖에서 보시는 분들과 달리 저희는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 지 아니까요. 세상에 쉬운 메달이 어디 있나요? 사이클 후배들 얘기 들어보니 현지 환경과 시설이 좋지 않았다던데 정말 고생했어요.” 그러면서 “저희 아름이도 이번에 잘했는데 축구가 너무 잘해서…”라며 웃음을 지었다. 

아시안게임에서 사이클 4관왕에 오르며 한국 선수단 전체에서 가장 많은 개인 메달을 획득한 후배 나아름 선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아름은 네번째 금메달을 달성한 뒤 “세 종목을 치르고 체력이 바닥났지만 민혜 언니의 응원 문자를 받고 이 악물고 달렸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황현수와 조유민은 “땀의 가치는 다르지 않은데 인기 종목이라는 이유로 저희가 너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 같아 죄송하다”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두 선수의 방문은 지난 2년 간 웃을 일 없던 이민혜 선수 가족에게 소중한 힐링의 시간이었다. 병실에는 이민혜 선수의 두 조카도 있었다. 친언니의 아들이었다. 할머니 대신 경기장에 가서 이모의 역주를 응원하던 두 조카 찬휘와 찬율은 최근 축구에 푹 빠졌다. 방과후 축구교실에 나가배우고 있다. 그런데 이모를 보기 위해 아시안게임에서 잘 했던 형들이 온다는 소식에 학교의 양해를 구하고 병실에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민혜 선수는 “저희 조카들 사진도 찍어 주고, 사인도 해 줘요”라며 ‘이모미소’를 지었다. 할머니도 모처럼 신이 나 외손자들에게 공과 사인지를 안겨줬다. 찬휘는 “저 황현수 선수 알아요. FC서울 경기도 봤어요”라며 다가갔다. 찬율은 “저희 아빠 수원 병원에서 일하시는데 오시면 공짜로 해준대요”라고 말하자 수원FC에서 뛰는 조유민은 “꼭 가야겠다”라며 함께 웃었다. 

축구와의 인연도 얘기했다. 어머니 최강희 씨는 “원래 민혜가 축구와 사이클을 놓고 고민했어요. 그런데 당시엔 여자 애가 축구하는 게 흔치 않으니까 말렸고. 사이클 선수가 됐어요”라고 말했다. 이민혜 선수는 “도하 아시안게임 때 여자 대표팀과 함께 숙소를 썼어요. 그때 친하게 된 홍경숙 언니랑 송숙(현 경주한수원 트레이너) 선생님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요. 송숙 선생님은 힘내라며 전에 여자 대표팀 선수들의 사인볼을 가져다줬죠”라며 추억을 꺼냈다.

10년이 넘는 직업 선수 생활과 국제대회에서의 성과로 얻은 것은 크지 않다. 남은 것은 어머니와 함께 지낼 집, 그리고 연금 30만원이다. 이미 지난 2년 간 쓴 치료비만 해도 상당하다. 이날 김학범호가 전달한 후원금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금액은 아니지만, 어머니는 여러 차례 허리를 숙이고 결국 눈물까지 보였다. 

“저희가 이런 도움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같은 종목도 아닌 축구가 도와주겠다고 하니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죠. 이렇게 찾아준 것만으로도 저희는 힘이 되는데… 너무 큰 금액에 손이 떨려요.”

종목을 뛰어넘어, 국가대표로서의 동질감과 존경, 그리고 너무나 보편적인 인간애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올림픽 메달 프로젝트라는 이유로 청춘을 받쳤지만 그 뒤에 남은 무관심은 이민혜 가족에게 국가대표란, 그저 국가를 위해 이용되고 마는 존재인가 라는 후회와 의문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 찰나에 김학범호의 후원과 선수의 방문은 국가대표, 스포츠를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아쉬움과 작은 원망을 재고하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마른 줄 알았던 어머니의 눈물이 그 증거였다.

“지난 여름에 급하게 백혈구 수치가 떨어져 증서를 구할 때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고, 민혜 기사가 나가고는 약재를 보내주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이번에 이런 도움까지 받으니 감사함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마음입니다.”

30여분의 병문안 동안 황현수, 조유민의 표정은 조금씩 상기됐다. 중간에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이민혜 선수의 모습을 보고는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도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이민혜 선수는 두 선수에게 “저 아직 은퇴 안했어요. 꼭 일어나 다시 달리고 싶어요. 두 분도 건강관리 잘하면서 오래 선수 생활하길 빌게요”라며 두 선수를 응원했다.

황현수는 “건강하게 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많은 분들의 관심과 격려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 깨달았어요. 아시안게임 이후에 소속팀에서 경기를 못 뛰며 그 원인을 남 탓으로 돌렸던 것 같은데 마음을 고쳐 먹게 됐어요. 제가 하고 있는 운동과 일에 정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걸 느끼고 갑니다”라고 답했다. 

조유민도 “이 곳에 오기 전 기사를 보고 모든 선수들이 후원금을 모으는 데 동의했어요. 종목은 다르지만 국가대표로서 성과를 내는 고통과 과정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너무 가슴 아파요. 오늘 보고 느낀 것을 다른 선수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저희가 이루는 것들이 저희만이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주변 분들과 함께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마음을 전했다.

이민혜 선수는 곧 퇴원을 한다고 한다. "민혜가 좋아하는 그 집으로 가서 환경이 바뀌면 조금이나마 좋아질까 기대하는 마음"이라는 게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다행히 절망적이기만 했던 상황에 조금은 긍정적인 징후도 보이고 있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국가대표의 몸과 의지여서 가능한 변화라고 했다. 

김학범호가 우리 사회를 대신해 이민혜를 응원했다. 다시 달리자고, 그리고 함께 달리자고.

대한축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