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곳곳에서 날아오는 온갖 사연에 어린이·장애인·마음아픈이 순
ㆍ1년이 걸리더라도 꼭 답장해
ㆍ“마음의 문을 활짝 여세요…숨어 있던 행복이 들어와요”



“… 오늘이라는 새 옷 위에/ 나는 어떤 모양의 단추를 달까/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새 옷을 갈아입어도/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 듯/ 평범한 일들의 연속이지/ 탄탄한 실을 바늘에 꿰어/ 하나의 단추를 달 듯/ 제자리를 찾으며 살아야겠네/ 보는 이 없어도/ 함부로 살아버릴 수 없는/ 나의 삶을 확인하며…”(이해인 수녀의 시 ‘단추를 달 듯’에서).

한 해가 또 이렇게 지나간다. 새해가 코앞에 와 있다. 한 번쯤 뒤돌아보는 시간들이다. 새로운 다짐들을 하는 때다. 오늘의 아침 해와 내일 아침 해가 뭐 그리 다를까. 그럼에도 이 아침에 한 해를 안녕히 가라 인사하고, 희망을 품으며 새해를 반가워한다.

2018년을 마무리하고 2019년을 맞으면서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73)를 찾았다.

헛헛해지는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위로받고, 자그마한 다짐이라도 탄탄하게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50여년 수도자의 길을 걸으며 시를 빚어내는 시인, 늘 그 자리에서 수많은 이들의 등을 다독여주는 ‘국민 이모’다. 그래서인가, 부산 광안리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을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다. 지하철역을 나와 수녀원으로 들어섰다. 여전하다. 1500여년 전 <수도 규칙>을 써 가톨릭 수도생활의 틀을 다진 베네딕트 성인상도, ‘Ora Lege Labora’(기도하고 읽고 일하라)라는 그 가르침을 따르는 수녀들도…. 수녀원 뜰의 아름드리 소나무처럼 이해인 수녀도 그렇게 있다. 수도자로 일하며 책 읽고 글 쓰고 손님들을 맞는 ‘해인글방’도 변함이 없다.

- 건강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문제는 없어요. 암 수술은 10년 됐고, 지난여름엔 무릎이 좋지 않아 병원 갔다가 회복 중이죠. 나이를 속일 수는 없지만, 보시다시피 목소리도 쌩쌩하죠. 투병도 명랑하게 해요. 이런 마음의 태도에 오히려 병이 놀라 달아나는 것 같아요.” 이해인 수녀는 “선종했다는 가짜뉴스도 나왔었죠”라며 웃음을 터트린다.

- 편지, 엽서가 지금도 이렇게 많네요(해인글방에는 엽서, 편지, 책과 소포 꾸러미들이 곳곳에 쌓여 있다. 전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것들이다). 여전히 답장 편지를 쓰세요.

“그럼요, 늦더라도 꼭 쓰죠. 얼마 전엔 군인, 미용사분이 1년 만에 답장을 받았다, 잊지 않아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어요(웃음). 편지와 엽서에는 세상 이야기가 다 들어 있지요. 제 시를 읽은 감상부터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온갖 고민들, 기뻐해 달라는 사연도, 슬픔을 나누고자 간구하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고…. 수녀원에서 이렇게 편지를 통해 이웃들, 세상과 만나고 소통합니다.”

답장을 쓰는 순서도 있다. “어린이, 장애인, 마음의 고통으로 급하게 저를 찾는 분들 순이죠. 친분이 두텁거나 유명하고 힘 있는 사람들은 나중이에요(웃음). 강연 요청도 이 같은 순서로 하죠.” “차별하는 거 아니냐”는 물음에 “마음이 더 아픈 사람, 약한 사람을 먼저 챙기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한다.

■ “시는 눈물과 인내의 열매…아까운 말도 용기 있게 버려야 더 빛나”

이해인 수녀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수도자의 길,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는 시인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결코 ‘꽃길’만은 아닐 그 길 위에서 시와 편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만남을 통해 수많은 이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이런 “작은 몫의 참여”는 곧 크나큰 사회사목 활동이 아닐까.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해인글방 뒤쪽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1986년부터 모아 놓은 편지와 엽서가 책장들을 가득 채운 방(‘해인글방창고’)이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엽서들이다. 시를 읽고 좋아 편지를 보낸 대학생들은 이제 50대가 됐고, 꽃그림 엽서를 보낸 여고생은 두 아이의 엄마다. “여기에 들어서면 영혼들의 울림이 있는 것 같아요.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제 나름 편지를 분류하고, 언제 답장을 했는지도 메모해 놓죠. 편지가 줄어드는 세상이라지만 해인글방에는 초등생부터 어르신들까지 계속 와요. 고마운 일이죠.” 법정 스님이나 박완서·최인호 작가 등 유명 인사와 주고받은 편지는 외부 행사에 전시되기도 한다. “저도 갈 텐데, 이 편지들을 어떡하나 할 때도 있어요. ‘편지문학관’ 같은 것을 세우자는 의견도 있고….”

- 최근 개정증보판 <사계절의 기도-이해인 기도시 모음>(분도출판사)이 출간됐습니다. 종교적 기도시와 일상 주제를 다룬 시 200편이 엮어졌네요.

“머리말에 썼지만, 1993년에 초판을 내고 손을 좀 봤었는데, 그 이후에도 많은 분들이 좋아하세요. 목사님이나 스님들도 기도 모임에서 많이 활용한다 하시고. 올해가 저의 수도서원 50주년을 맞은 해라서 좀 더 보완했어요.”

제 삶의 태도와 문학세계가

함축됐다고 할까요

하루에 보고 듣고 느낀 것

일기로 남겨 ‘시상’ 얻어

- 시 작업은 여전하신가요.

“좀 쉬어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특별히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신중히 하죠. 지금은 한 문학잡지 마감을 앞두고 있고. 일기는 열심히 쓰고 있어요.” 이해인 수녀의 일기 쓰기, 부지런한 메모는 편지 답장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다. 실제 책상 한편에 놓인 두꺼운 공책 표지엔 ‘162’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162권째의 일기장, 메모 공책이다. “매일 한두 줄이라도 꼭 쓰죠. 일기장도 되고, 시상을 정리하는 노트도 되고. 쓸 만한 게 없을 때는 사진을 붙이거나 읽은 시 가운데 좋은 것을 적어놓죠. 오늘은 건너뛸까 하다가도 누구와 밀면을 먹었다든지, 기차나 꽃을 본 짧은 느낌들도 정리하죠.”

수녀 시인의 공책에는 별별 일들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대장내시경을 한 날에는 내시경 관련 이런저런 생각들의 단편이 적혔다. ‘의사 선생님, 무엇을 보셨나요?’라는 식이다. 공책들은 이해인 수녀의 시가 만들어지는 집이다. 그 집에서 생명을 얻은 시들은 일상적 언어로 편하게 다가와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매일 적다보면 삶이 게으를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저를 돌아보는 시간도 되고….” 매일 정리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수도자로서, 시인으로서의 끊임없는 수행, 엄격한 자기 단련으로 읽힌다. 슬며시 스며드는 나태함, 교만을 물리치고 자신을 다스리고 길들이는 것이다. 어쩌면 수도자로서의 통찰, 시인으로서의 오감을 유지하고 벼리는 작업이 아닐까.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많은 이에게 희망을 전하고

내게 ‘시’라는 것은

날개 달린 천사와 같아

- 1976년에 수녀회 종신서원을 하고, 그해에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내셨어요. 시집 출간될 때마다 큰 호응을 불렀죠. 수녀님에게 시는 어떤 존재인가요.

“시가 날개를 단 천사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제 글을 읽고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는 것 같다, 착해지는 것 같다, 위로가 되고, 다시 기도하고 싶어진다고 할 때죠. 시가 마음이나 몸이 아픈 이웃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성찰과 치유의 역할을 하는구나 싶어요. 제 시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며 위로천사, 희망천사 역할을 하는 거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한 소년의 생각을 바꾸게 됐다는 사연을 접하면 수도자로 시를 쓰는 일, 독자분들, 모든 게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 시의 힘, 문학의 힘을 보여주네요. 시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참 많은 것들을 버린 후에야 얻는 살아 있는 상징언어가 아닐까요. 상징언어가 살아 있자면 밑바탕에 진실함이 있는 거고. 어쩌면 시는 기도와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소설이나 산문은 다시 보는 경우가 드물지만 시는 그렇지 않잖아요. 읽을 때마다 새로워지죠.”

-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수녀 시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란 생각도 들고.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에 실린 ‘서시’죠. ‘당신 안에 숨 쉬는 나의 매일이 읽을수록 맛드는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때로는 아까운 말도 용기 있게 버려서 더욱 빛나는 한 편의 시처럼 살게 하소서.’ 아까운 말도 용기 있게 버려야 더 빛나는 시가 됩니다. 제 삶의 태도, 문학세계가 함축됐다고 할까요.”

- 시를 향한 태도, 수도자로서의 어떤 다짐도 엿보입니다.

“1964년에 수녀회에 입회했고, 68년에 수도서원, 76년에 종신서원을 했죠. 수도자의 길은 모태신앙과 함께 친언니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친언니는 이인숙 데레사 말가리다 수녀로 지난해 선종했다). 청소년들과의 만남에서 수녀가 된 계기를 묻길래,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수도자는 더 많은 이웃, 세상과 더 넓은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어요. 물론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한 길 위에 계속 있었어요. 함께 가는 공동체 수도자들, 이웃들께 감사하죠.”

이해인 수녀는 30여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보내온 편지와 엽서를 ‘해인글방창고’에 정성스럽게 보관하고 있다. “영혼들의 울림이 있는 것 같다”는 방이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이해인 수녀는 ‘수도자의 길’ ‘시인의 길’을 함께 걸어오고 있다. 어느 길도 결코 ‘꽃길’이 아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가시밭길이자,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는 길이다. 기도가 시이고, 시가 기도이며, 그 기도와 시가 곧 삶이다. “수도자 생활과 시는 절제하고 비워낸다는 점에서 닮은 데가 있다” “수도자는 무소유자죠. 명예가 있다면 그 명예도, 영광도, 책 인세도 모두 하느님의 몫”이라는 말이 더 다가온다.

-두 길 걷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어떤 분들은 제가 늘 우아하게 산책하고 한가하게 차를 마시며 시만 읽는 줄 알아요(웃음). 저는 수도자이고 맡은 소임도 있지요. 시는 눈물과 인내의 열매입니다. 짧은 시 한 편에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담겼어요. 한때는 소녀적·감성적으로만 제 시를 해석하는 게 아쉬웠고, 수녀여서 시가 돋보인다는 말이 안타깝기도 했어요(웃음). 그럴 때 정채봉 선생님 같은 여러 분들이 많은 힘을 주셨죠. 이제 나이가 드니 세상도 더 넓게 보이고 안목도 깊어지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렇게 시를 쓸 수 있다는 게 큰 선물이구나 감사하게 여기고, 시를 통해 나라와 지역, 남녀노소, 종교까지 뛰어넘어 모두를 만나고 친구가 되잖아요. 얼마 전에는 ‘부산시 광안리가 보이는 수녀원의 수녀님’이라는 주소인데도 편지가 저한테 배달되더라고요. 고마운 일이죠.”

인터넷에 제 이름을 단

‘짝퉁’ 시 꽤 많이 나돌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요

많은 이들이 이해인 수녀의 시를 좋아하다 보니 인터넷에는 이해인이란 이름을 단 ‘짝퉁’ 시들도 꽤 많이 나돈다. 황당하지만 수십편에 이른다. 일부 언론들마저 이해인 수녀의 시로 인용한 경우도 있다. “제가 쓴 시가 아닌데 제 이름을 단 게 많아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요. 수녀가 막 나설 수도 없고(웃음). ‘너에게 띄우는 글’ ‘1%의 행복’ ‘내 마음이 메마를 때면’ ‘열두 달의 기도’ ‘행복한 기다림’ 등이 대표적이죠.”

- 많은 분들이 수녀님은 행복의 비법을 아는 것 같다고 하는데요.

“(웃음) 아유 참, 특별한 비법이 있나요. 일상에서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게 비법이라고 해야 하나? 다들 행복, 기쁨 이런 말은 많이 하는데 생활 속에서 얻으려는 실제 노력은 적어요. 행복은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고, 감탄하는 데서 오는 것 같아요. 굶지 않은 것에, 신발을 혼자 신을 수 있는 것에, 가족이 있음에, 하늘과 꽃이 있음에 감탄하고 감사하는 거죠. 한 번 둘러보세요, 얼마나 감사하고 감탄할 게 많은지. ‘행복의 얼굴’이라는 시가 있어요. ‘… 마음의 문 활짝 열면/ 행복은 천 개의 얼굴로/ 아니 무한대로 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어디에 숨어 있다/ 고운 날개 달고/ 살짝 나타날지 모르는 나의 행복/ 행복과 숨바꼭질하는/ 설렘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오늘도 행복합니다’.

■ 수도자·시인의 길 중 하나를 택하면? “못된 질문이네, 수도자 삶이죠”

이해인 수녀는 “장독대의 간장과 고추장, 된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의 향을 간직하며 숙성되고 익어간다는 점에서 수도자의 삶과 닮았다”고 말한다. 그는 ‘장독대에서’란 시에서 “…고추장을 뜨면서/ 맵게 깨어 있는 지혜와/ 기쁨을 배우고/ 된장을 뜨면서/ 냄새나는 기다림 속에/ 잘 익은 평화를 배우네…”라고 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라

주변 천 개 얼굴로 숨어 있어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라, 주변에 천 개의 얼굴로 숨어 있어요.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자세,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것도 행복을 누리는 길인 것 같아요. 내가 먼저 배려하면 그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내게로 돌아옵니다.”

이해인 수녀는 ‘소확행’도 의미 있지만 더 큰 행복이 있단다.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소확행’도 정말 중요해요. 그런데 나를 향한 소확행을 조금 더 넓혀 이웃으로 향하면 어떨까요. 커피 한잔, 외식을 한 번 더 줄여 모은 것들을 이웃에 나누는 거죠. 선한 영향력으로 나는 물론 이웃들까지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면

나에게로 그 선함이 돌아와

- 사회가 더 팍팍해지고, 세상살이도 힘들어진다고들 합니다.

“정신적 허전함을 느끼고, 외로워하는 것 같아요. 누구나 ‘이기적 예민함’이 아니라 ‘이타적 예민함’을 가지면 좋겠어요. 나, 내 가족, 내 동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로 챙겨주는 마음을 확장하는 거죠. 내 일이 아니라고 무관심한 게 아니라, 사회적 공동선을 위해 모두가 나서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덜 외롭고, 허전함도 덜하지 않을까요? 제 경험상 아플 때 옆의 더 아픈 이를 챙겨주면 내 아픔도, 그분의 아픔도 줄어들더라고요.”

- 이념과 세대, 남녀 사이에 갈등을 넘어 혐오로까지 번지는 경우가 많아요. 극단적 말과 행동도 잦아지고요.

“내 탓보다 네 탓만 하고, 공동선을 위한 노력이 부족해서죠. 사실은 정치인, 사회 지도층 분들이 모범을 보여야 할 것 같아요. 견해가 달라 싸울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말과 행동을 보다 정화된 말과 행동으로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모범이 돼야지요. 언론도 마찬가지고요. 그러자면 인격적인 성숙, 자기 수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수녀원에서는 늘 허물을 고백하는 시간이 있어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를 통해 개선되고요.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짧게라도 꾸준히 가졌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만나는 일이고, 한 발 물러나 자신을 보는 시간입니다.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그러면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어지고, 삶의 품위도 지키면서 상대방 의견도 경청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더 평화로워질 겁니다.”

- 수녀님은 누군가, 무슨 일에 화가 나면 어떻게 마음을 삭입니까.

“맞서고 언성을 높이면 뒤끝이 좋지 않더라고요(웃음). 빈 성당을 찾아 기도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산책하거나, 낙서를 하기도 하죠. 인격수양을 이야기했는데…, 스스로 이만큼이면 됐지 하고 방심하면 교만이 몰래 들어차요. 훌륭하다는 평판을 듣는 분들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거나 긴장시키는 경우가 있지요. 자신과 다르다고 차별하기도 하고요. 서로의 다름, 차이를 인정하는 게 중요하죠.”

- 아주 ‘못된’ 질문을 하나 할게요. 수도자의 삶, 시인의 삶 가운데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요.

“정말로 못된 질문이네(웃음). 괜한 오해를 낳아 저를 곤란에 빠뜨리려고 그러죠?(웃음). 꼭 한 삶을 택해야 한다면 수도자의 삶을 살 것 같아요. 아이들 낳고 행복하게 살 수도 있지만, 또 수도자의 생활이 힘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수도자의 삶은 하나의 종합예술처럼 아름다운 것 같아요. 희생도 있지만 아름다운 일, 보람된 일입니다.”

- 청년들이 많이 힘들어합니다. 위로와 희망이 필요합니다.

“제게 오는 편지·엽서들만 봐도 느껴져요. 수녀원에서도 청년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등 관심을 높이고 있고요. 미안함을 가진 기성세대 모두가 더 노력해야겠지요. 청년들도 자포자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청년들을 만날 때 늘 강조하죠. 청춘의 시기는 짧고 빨리 지나가니 말이라도 죽겠다고 하지 말고 살겠다고 하면서 사는 쪽을 생각하라고. 미래에 희망을 만들어야죠.”

교황님 북한 방문 앞두고

많은 생각을 하고 계실 것

- 올 한 해는 남북정상회담 같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향한 큰일들이 있었습니다. 화해와 평화를 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북한 방문 여부도 주목됩니다.

“제 아버지도 6·25 때 납북되셨어요. 생사조차 알 수 없습니다. 정상회담을 보며 누구보다 기뻐했어요. 수녀원에서도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왔는데, 우리의 숨은 기도가 빛을 보는구나 했죠. 기도를 더 해야겠구나 생각도 하고요. 그동안 오래 갈라졌었으니 조금씩 다방면에서 교류가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이산가족들은 자주 만나고, 여행도 오가며 조금씩 가까워지면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로 이어지겠죠. 교황님도 그동안 한반도 평화정착과 관련한 말씀들을 하셨어요. 북한 방문을 두고 깊고 신중하게 많은 생각을 하고 계실 겁니다.”

-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운동도 활발한 한 해였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어요, 안타깝기도 하고…. 올해를 계기로 다시는 이런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들을 해야 할 것 같아요.”

- 새해는 어떤 한 해로 만들 생각이세요.

“수도자니까 수도공동체의 연중계획을 가장 먼저 따르죠. 수녀원 동료들은 물론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필요를 더 읽어내고 성실하게 답해주고 싶어요.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더 실천하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고. 제가 좋아하고 따르려는 <논어>의 글귀가 있어요. ‘다른 이를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친절하게,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릿발처럼 엄격하게 대하라’는 의미의 ‘接人春風 臨己秋霜’(접인춘풍 임기추상)입니다. 또 ‘나 자신을 갈고닦아 다른 이를 편하게 하는 삶을 산다’는 뜻의 ‘修己安人’(수기안인)도 있죠. 새해에는 이렇게 살고 싶어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런 태도로 산다면 분명 더 나은 한 해,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천호동 화재’ 추모시 보내

희망을 필요로 하는 곳에

동참하며 ‘작은 몫의 참여’

이해인 수녀는 ‘국민 이모’라 불린다. 4시간여를 같이 있는 동안에도 편지, 택배가 끊이질 않는다. 왜 ‘국민 이모’인지 알겠다. 이만한 사회 사목이 있을까 싶다. 이해인 수녀는 수녀원에 있지만, 한국 사회 곳곳에서 그를 찾는다. 실제 30일 서울 강동구에서 열린 ‘천호동 화재 희생자를 위한 추모 미사’의 고별식에서도 이해인 수녀의 추모시가 낭독되며 안타깝게 희생당한 여성들을 떠나보냈다. 시를 통해, 마음을 통해 이웃의 아픔이 있는 곳, 위로와 희망을 필요로 하는 곳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해인 수녀는 “작은 몫의 참여”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가족여행, 출장, 문상을 온 사람들이 예고 없이 수녀원을 찾아들기도 한다. “당황스러울 때도 많죠. 그렇지만 ‘이해인 수녀’가 박대를 한다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웃음). 엄마에게 얘기 못하는 걸 이모에게는 하잖아요.” 함께 수녀원 곳곳을 산책했다. ‘장독대에서’란 시에서 ‘겸손’ ‘지혜’ ‘기쁨’ ‘잘 익은 평화’를 배운다고 표현한 숨겨진 장독대에도 들렀다. 이 세상의 모든 색을 합하면 검은색이다. 그 검은색 수도복의 이해인 수녀는 ‘이모’였다. 그 ‘이모’가 있는 곳은 이제 그의 시처럼 ‘민들레의 영토’가 됐다.

해인글방을 나오는 길. 일흔이 넘은 이해인 수녀가 필자가 편하게 신도록 신발을 돌려놓는다. 후다닥! 움직였지만 늦었다. 어쩌나! “저는 선한 영향력, 제가 한 행위가 나를 넘어 한없이 퍼져나가는 그 힘을 믿는다”며 이모의 미소를 짓는다. 수녀원을 나서면서 ‘함부로 살아버릴 수 없는 나의 삶을 확인’하면서 ‘하나의 단추를 달 듯 제자리를 찾으며’ 살아야겠다고 ‘단추를 달 듯’의 구절을 되새겨본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부산지하철 2호선 안에서 자리를 양보했다. 부산역 에스컬레이터에선 앞사람에게 “장갑이 빠질 것 같다”고 알려줬다. 바다 같은 어진 마음이란 뜻의 필명(해인·海仁)을 가진 수녀 시인. 그의 바람처럼 새해에는 선한 영향력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기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