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동명숙 씨는 “독립운동을 했던 동풍신 할머니 존재를 알고 나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확신이 더 커졌다”고 했다. “나처럼 독립운동가 선조가 있는 북향민들이 분명히 또 있을 텐데 그들도 적극적으로 선조 유공자 찾기에 나섰으면 한다”고 했다. | 김청연 기자

명숙(42) 씨는 성이 동씨다. 동명숙! 이름은 흔한데 성은 드물다 못해 귀하다. 살면서 이름, 성까지 똑같은 이와 마주쳐본 일이 없다. TV나 라디오, 신문에서도 보거나 듣지 못했다. 동명이인은 둘째치고, 종친회 아니고는 동씨를 만날 기회조차 거의 없다. 2015년 통계청 조사를 보면 대한민국에 동씨 성을 가진 사람은 5462명이다.

“함북 명천 동풍신 열사” 호명에 귀 번쩍
지난해 3월 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을 TV로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사 도중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호명한 이는 유관순 열사였다. 역시! 명숙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념사가 이어졌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의 동풍신 열사는 함경북도 명천 만세 시위에 참가했고 이곳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이번에는 귀가 번쩍 뜨였다. 동풍신 그리고 명천….
명숙 씨는 탈북인이다.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조상은 모두 명천의 광천 동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같은 마을 출신 동풍신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른들한테서 마을 집안에 독립운동을 한 선조들이 있고, 그 가운데 고모할머니뻘 되는 이도 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다. 풍문이나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문 대통령의 기념사를 들은 뒤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손녀뻘이라는 자부심과 그럼에도 자신은 손녀 구실을 못했다는 죄스러움이 마음속에서 ‘뒤챘다’. 하얀 국화를 품에 안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았다. 동풍신 할머니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기록물도 찾아봤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활동 상황 4줄이 나왔다. 사진도 없는 달랑 4줄! 대통령이 유관순 열사 다음으로 호명한 이의 기록치고는 너무나 빈약했다. 어쩌다 북쪽 고향 후손은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그나마 있는 남쪽의 기록은 이토록 민망한 수준일까. 명숙 씨는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나라 잃은 탓이 클 터였다. 자신을 지켜줄 나라가 없었던 동풍신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일제에 저항하다 숨졌고, 당연히 후손도 없다. 그의 아버지 동민수 열사(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는 명천 만세 시위 때 일경의 총격으로 숨졌다. 어머니의 생사는 알려진 바 없다. 그를 기억하고 기릴 만한 혈육이 없었으니 긴 세월이 흘러 고향 명천에서조차 그에 대해 온전히 아는 이가 없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했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도 부모 모두 일제에 희생되고 후손도 없지만 수백 편의 책과 논문이 나와 있고 역사관까지 있지 않은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쪽에 물으니 동풍신 할머니에 관한 기록은 6·25전쟁 때 대부분 소실됐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아버지와 같은 해인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걸 보면, 적어도 정부가 그의 존재에 대해 아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동명숙 씨가 독립문 앞을 거닐고 있다.| 김청연 기자

삶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분단
명숙 씨는 작은 실마리라도 찾고 싶어 자료를 검색했다. 정부가 오랫동안 북한 출신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애써 무관심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보게 됐다. 바로 느낌이 왔다. 북한은 그보다 훨씬 심했으니까. 명숙 씨는 북에서 김일성 일가의 신화 말고는 남한 출신이든 북한 출신이든 다른 누구의 항일투쟁도 배운 기억이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남과 북 둘 다 항일투쟁의 역사가 온전히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분단과 전쟁, 그 뒤로 계속된 적대 관계의 역사!
어쩌면 자신도 그 역사가 온몸에 화인처럼 깊이 새겨진 존재인지 모른다고 명숙 씨는 생각했다. 실제로 분단은 그의 삶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지나간다.

명숙 씨는 세는 나이로 스물세 살 때 홀로 두만강 국경을 건넜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 때였다. 한창 자랄 성장기에 죽음에 가까운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도강이었다.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하고, 대문 앞에서 어머니의 배웅을 받았다.
명숙 씨는 그 순간을 ‘두부 한 모’로 기억한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두부를 주셨다. 남에서는 출소하는 이에게 두부를 먹이지만 북에서는 먼 길 가는 이의 안녕을 빌며 두부를 먹이는 풍습이 있다. 두부를 꾸역꾸역 입에 넣은 다음, 살아서 다시 볼지 알 수 없는 어머니를 등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200m쯤 걸어 길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가 골목길 끄트머리에 동상처럼 붙박여 있었다. 되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앞만 보고 달렸다.

누구보다 다중적이고 복합적 이방인
두부 덕분인지 모르지만 들키지 않고 강을 건넜다. 오래지 않아 기적처럼 남은 가족도 모두 탈북에 성공했다. 적어도 이산은 면하게 됐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중국에서 바로 갈 방법이 없었다. 일가족은 여권도 없이 이름만 겨우 들어본 나라들의 국경을 넘었다. 몇 날 며칠 우거진 밀림을 헤치며 걷기도 했다. 모두 네 나라의 국경을 넘고 또 넘으면서 꼬박 1년이 걸려 대한민국에 들어왔다. 2002년의 일이었다.
명숙 씨는 경북 안동에 정착해 식당 일부터 시작했다. 그곳 남자와 결혼하고 아들도 낳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뭐든 억척스럽게 배워나갔다. 사람들과도 열심히 어울렸다.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으니 주저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경계 위에 서 있는 자신의 위치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허물없이 지내던 이들은 무심결에 혹은 결정적인 순간에 명숙 씨를 이방인으로 대했다. 간첩 아니냐며 의심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재중 동포도 비슷한 처지 같지만, 적어도 그런 의심은 받지 않는다. 먼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지척의 고향에 가볼 수도 없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탈북인은 다른 누구보다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이방인이었다. 명숙 씨는 그 결정적 원인이 분단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안동 생활 7년 만인 2010년, 명숙 씨는 생후 26개월 된 아들을 둘러업고 서울로 올라왔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탈북인이자 중간에서 남과 북을 바라볼 수 있는 경계인으로서 통일의 디딤돌이 되겠다는 각오로 전공을 북한학으로 선택했다. 탈북 대학생 최초로, 여성운동가이자 평화통일운동가인 이우정 선생을 기리는 ‘이우정평화장학금’도 받았다. 여러 단체에서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활동을 활발히 펼치기도 했다.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를 찾은 동명숙 씨 | 동명숙

여러 단체서 남북 평화·통일 활동
그러는 동안에도 삶의 불행은 길 위의 돌부리처럼 자주 발길에 차였다. 병환이 깊어진 시어른의 병시중과 임종, 생업, 육아 등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하지만 삶의 가닥이 다시 어느 정도 가지런해지자 지난해 복학해 20대 학우들 사이에서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명숙 씨는 자신을 북향민이라 부른다. 탈북인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을 이 사회가 애써 구분 짓는 표현 같아 소외감이 느껴졌다.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해 애타는 마음까지 담아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고심 끝에 찾아낸 표현이 ‘북향민’이었다. 막상 이름을 짓고 나니 그 뜻이 애초 생각보다 커졌다. 자신을 북향민이라고 부르면 어쩐지 남과 북을 연결하는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호호. 그런 거창한 해석은 필요 없고요. 북향민들은 그저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 통일을 원해요. 명절에 고향에 가고, 여기 사람들과 차별 없이 지내고, 또 열심히 일해서 나라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은 평범한 꿈을 분단과 대립 상태에서는 이룰 수 없거든요.”

하지만 명숙 씨는 동풍신 열사의 존재를 알고 나서 “전보다 삶의 목적에 대한 확신이 커진 것 같다”고 했다. 목숨 바쳐 일제에 항거한 독립 열사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자신이 평화와 통일을 위해 사는 건 숙명인지 모른다면서.
 
안영춘 <한겨레> 기자

 

▶동풍신 열사를 참배하러 갔을 때 들고 간 국화꽃 | 동명숙

독립운동 쌍둥이 큰 증조할아버지 서대문형무소에서 기적처럼 확인
“제 친정아버지와 똑 닮은 얼굴 사진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것도 두 분이나.”
동풍신 열사를 참배하러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명숙 씨는 어려서 들은 명천의 독립운동가 선조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한 독립운동가를 검색할 수 있는 안내 모니터를 두드려봤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선조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동씨 성 가진 독립운동가가 더 있는지 살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너무 낯이 익다 싶은 얼굴 사진 두 장이 마치 복사해놓은 것처럼 떴다. 동영현과 동승현. 1895년 11월 24일 함북 명천군 하운읍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고,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던 일제의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29년과 30년에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한 것으로 나왔다.
출력한 사진을 들고 인천에 정착해 사시는 친정 부모를 찾았다. 아버지는 최근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쌍둥이 형제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 명숙 씨의 큰증조할아버지들이었다. 5형제 가운데 막내인 증조할아버지에게 부모님 수발을 맡기고 형들은 독립운동하러 떠났고, 그 뒤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얘기를 들었노라고 아버지가 일러줬다.

명숙 씨는 광천 동씨 종친회를 찾아가 족보를 확인하고, 동승현 할아버지가 3·1 운동과 신간회에 참여했다는 기록도 따로 찾아냈다. 그러나 두 분의 출소 뒤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쪽에 물으니 “당시 치안유지법 수감자들은 고문을 하도 심하게 당해 출소 뒤 오래지 않아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답이 돌아왔다.
명숙 씨는 지난해 7월 국가보훈처에 아버지 명의로 두 분에 대한 독립유공자 등록을 신청했고, 오는 2월 말 나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기적 같아요. 제가 그날 동풍신 할머니를 참배하러 가지 않았다면 두 분은 영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외로운 영혼으로 남지 않았을까요?”
명숙 씨는 “분단 기간을 고려하면 두 분처럼 빛을 보지 못한 북한 출신 독립운동가가 생각보다 많을 것”이라며 “북향민들이 서둘러 선조 유공자 찾기에 나섰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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