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여고 학생들. 맨 오른쪽이 필자.■ 사랑합니다 - 의성여고 학생들
6년 전 오사카(大阪) 간사이(關西) 공항 출국 수속 줄에 서 있을 당시만 해도 내가 의성여고에서 전문상담교사로 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웃음과 눈물이 가득했던 5년여의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길에 올랐을 때, 끝내지 못한 박사 논문에 대한 아쉬움과 결과 없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부끄러움이 설렘과 후련함으로 가득해야 할 귀국길의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의 불편했던 감정을 잊지 못했던 것인지 한국으로 돌아와 첫아이를 출산하고 밤잠 설쳐가며 끝내지 못했던 박사 논문에 다시 매달렸다. 그러고 귀국한 지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공교롭게도 코로나19의 전 세계적인 유행으로 그렇게 꿈꾸던 박사학위 수여식에는 가보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남편이 경북 의성군에서 근무하고 있던 터라 귀국하자마자 나는 ‘컬링’으로 유명한 그곳에 터를 잡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여러 대학에 원서를 냈지만 한국에서의 강의 경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거리가 멀어 포기하기 일쑤였다. 아들도 너무 어려 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이와 오랜 시간 떨어져 있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컬링으로 유명한 의성여자고등학교에서 전문상담교사로 일하게 됐다.
심리학과 4학년 시절, 전문상담교사 교생실습을 끝마치며 ‘역시 청소년 상담은 내 길이 아니야’라고 다짐했던 내 모습을 뒤로하고 학교 위클래스에서 매일 아침 ‘오늘은 어떤 친구들이 위클래스를 방문해 줄까’ 하며 기대하는 나를 보며, 그토록 힘들었던 유학생활의 경험이 지금의 내게 좋은 밑거름이 돼 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업, 가족, 친구 문제로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다양한 인생의 경험을 가진 것이 은행 적금 잔고가 쌓이는 기쁨보다 더 컸다.
전문상담교사로 일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적 지식은 물론 방대한 양의 상담이론과 기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인본주의심리학의 아버지인 ‘칼 로저스’가 이야기했듯 모든 상담에는 그 사람 자체를 존중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가 강조했던 ‘경청과 공감’ ‘무조건적인 수용’은 비단 상담 시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학생들을 상담하다 보면 ‘내 마음과 생각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많다. 언뜻 생각하면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잘 표현하지 못하는 데는 ‘타인의 진심 어린 표현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진지충’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진지한 것은 어색하고 패배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게 어린 세대의 생각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친구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행위는 곧 내 안에 있는 자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하는 용기와 원동력을 얻게 한다. 내가 아이를 낳고 양육하면서 간신히 나를 붙잡고 시간을 쪼개어 박사 논문을 준비했던 것도 어찌 보면 비행기 안에서 겉으로 괜찮은 척하며 속으론 힘들어했던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참다운 ‘나’를 만나고 있을 의성여고생과 같은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괜찮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현재 너의 마음에 집중하면 돼! 그리고 고마워. 내가 나다울 수 있도록 기회를 줘서.’
의성여고 전문상담교사 박윤희
문화일보 |